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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양피지/2권

서막

(◉◞⊖◟◉) 2017. 5. 4. 20:42



직 밤의 그늘이 드리워진 어둠의 한가운데 손을 문지르며 우물이 있는 정원으로 나왔다. 이곳에서 며칠 동안 끙끙 앓아 잠을 푹 잔 터라, 이처럼 일찍 일어나는 것은 오랜만이다. 머무른 곳은 상관(商館)으로 『시간은 금』이라는 상인의 말이 와 닿았다.
 우물 옆, 기대어져 있는 막대기를 사용해 우물 바닥에 붙은 두꺼운 얼음을 깼다. 길어 오른 물은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얼굴을 씻으면 칼로 깎아내는 것처럼 느껴져 졸음이 달아났다. 얼굴을 닦고 차가운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신 후 하늘을 바라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이 상쾌했다.
 언 땅에 무릎을 꿇었다. 모직 카펫을 깔 필요는 없었다. 추위와 고통을 감내해야 신에게 바치는 기도에 뜨거움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평온한 공기에 언제까지나 기도를 바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하늘이 밝아질 무렵이 되자 일찍 일어난 상인들의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다간, 장사가 번창하길 기원하는 기도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줄이 늘어설 것이다.
 그렇게 돼서 몸 상태가 다시 좋지 않아지면 이득은 물론 본전도 없다. 적당한 순간에 기도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후, 책상 위에 종이와 잉크를 올렸다. 늦었지만, 편지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편지의 목적지는 어린 시절부터 신세를 져왔던 부부에게였다. 내용은 여행의 상황을 알리는 것으로 자신들이 체류한 항구 도시에서 어떤 일에 연루되었고, 어떤 난리를 겪었는지를 담았다. 두 사람은 귀가 밝으니, 이곳에서 어떤 소동이 벌어졌는지는 곧 듣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 그들의 걱정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단어를 고르며 신중하게 써내려갔다. 자신은 은인들의 외동딸을 맡은 중인 데다, 특히 딸의 안부에 안절부절못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쉽게 상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르면 이제 시집을 가야 할 나이의 딸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다고 적었다. 아니, 과로로 쓰러진 자신을 부지런하게 돌봐준 여성스런 면모를 보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먹성과 이기심, 그리고 장난기는 그대로였지만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 줬고 그것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덧붙였다. 그리고……. 글을 쓰던 펜을 멈췄다.
 며칠 전, 난리를 치던 와중에 자신은 딸이 수년간 숨겨왔던 비밀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딸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몰랐던 사람은 남자들뿐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딸의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전달해야 했지만 펜을 멈출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딸에게는 마음에 품은 남자가 있고 그 남자는 여행을 함께 다니는 자신이었으니까.
 딸의 아버지가 이를 알게 된다면 딸이 늑대와 여행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자신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으며, 티끌만큼의 실수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적어 보낸다면 쓸데없는 불안을 부추기게 될 거 같았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국 적지 않았다.
 여행은 무사히 계속될 거 같습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그런 구절을 쓴 후, 토트 콜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사실 딸 뮤리의 서명도 넣어야 했지만, 그랬다간 뮤리는 틀림없이 이 편지를 보고 내용을 고치려고 들것이다. 일이 복잡해지는 걸 피하고 싶다.
 편지를 봉하면서 뭔가를 속이는 꺼림칙함이 조금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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