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후기 산성지는 수명이 30년에서 50년, 중성지는 그 세배. 화지는 천년, 양피지도 천년 정도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이 중성지에 인쇄되고 있다면 얼마나 팔려나갔다고 해도, 100년부터 200년에 한 번은 새 책으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무(無)로 돌아가는 운명인 것입니다.문자를 쓰는 매체의 수명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처음으로 책방의 선반에 줄지어 놓인 많은 고전(古典)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때로 엄청난 행운이 겹쳐서 천년이나 이천 년 전에 쓰인 글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책이 누군가에 의해서 몇 번이나 베껴져 전해졌다고 합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그 사슬이 끊어졌다면 영원히 전해지지 못했을 거라고. 그..
나와 클레어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쟈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볼일이 끝났다는 말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클레어는 나와 쟈드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탔고, 한밤의 길을 걸어갔다. 길가에서 잠깐 노숙 한 후, 다음날 낮이 되어서야 상회에 도착했다. 쟈드는 마치 산책을 다녀온 듯했지만, 나의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말에 올라탄 클레어도 오랜만의 긴 승마에 지친듯했다. 마중 나온 쟈드님께 인사를 드리는 둥, 마는 둥 한 나와 클레어는 상회의 객실로 안내되고 나서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눈을 뜬 것은 저녁이 되고 나서였는데, 클레어 쪽이 좀 더 빨랐던 것 같다. 유리창을 통해 항구에서 벌어진 소동을 바라보던 클레어는 내가 깨어난 것을 알게 되자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서적상의..
정오 무렵엔 작업해야 할 분량이 많이 줄어 있었다. 클레어는 대부분 책을 읽었었는지, 나보다 단연 작업이 빨랐다. 아무래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대강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잠시 쉬기 위해 서고의 입구에 턱, 하고 걸터앉아 클레어가 담당한 목록 초안을 확인하자 책의 종류별로 정연하게 나누어져 있다. 『역시 책을 읽는 가문이었구나….』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실로 아쉬웠다. 서적상이 되는 것은 체념했지만, 책에 대한 사랑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책을 읽는 가문의 여자와 책 이야기를 꽃피우는, 그런 꿈 또한 아직 마음속에 있다. 그런 이유로 목록을 손에 쥔 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볼에 뜨거운 물건이 닿아 뛰어오를 뻔했다. 『우, 왓, 왓』『내 작품에 뭔가 불만이라도?』 뒤돌아보자..
눈을 뜨자 식당 안에 햇살이 바스라져 들어왔다. 햇살의 기울기를 보자 낮인 듯 했다. 난로 속의 잉걸불은 굉장히 따듯했다. 계속 이렇게 빈둥거리고 싶다는 유혹이 강렬했지만 나에겐 해야할 일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줘 일어나보니 머리맡에 식기와 작은 항아리가 놓여있다. 클레어가 구워준 듯한 무효모빵과 포도주였다. 『….』 뾰족한 말투와 행동을 보여주지만 역시 혈통이 좋아서 인지 여성스러움이 느껴진다. 클레어가 곤란해 하고 있다면 서적상 흉내와는 상관없이 힘이 되어주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기엔 충분하다. 물론 정말 그렇게 해줄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은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방대한 책의 지식이 있는, 이른바 수천 년을 거쳐 온 현자들의 조언이 있다. 두려움은 없다. 『좋아.』 기합을 넣고 식당을 ..
『어째서 내가 장작을 패야 하는 거야.』 라고 중얼거렸지만 쟈드는 무시한 채 빠르게 쌓여있는 장작을 들어 올리더니, 지금은 거의 쓰지 못하고 있는 수도원의 가장 큰 건물로 옮겼다. 그곳에는 식당이 있는데 날도 저물고 있었으므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식사를 하기로 해 지금 그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식재료들은 고급재료들이 남아돌고 있다. 『그걸로 빵을 만들어?』 밀가루 반죽을 넣은 납작한 냄비를 든 나를 바라보며 클레어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난로에는 이미 쟈드가 피운 불이 타오르고 있다. 큰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있긴 하지만, 쟈드와 클레어는 벽난로 앞 바닥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다. 가끔 청소한 듯 지금 당장 손님들이 와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러므로 사람이 살지 않은 장소인 것을 다시금..
그랜든 수도원 도서관 입구 위에는 이빨을 드러낸 악마 형상의 조각이 새겨져 있어서 방문객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앞쪽부터는 지옥이라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서관에 나쁜 마음을 먹고 침입해 장서를 훔치지 말라는 경고를 위한 것이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책을 훔치는 성직자들의 이야기는 심보가 고약한 귀족들이 즐겨 말했다. 태평한 쟈드는 악마상(像)을 찬찬히 아래에서 올려다봤지만 나는 책의 매입을 위해 온 것이지 도둑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핑계를 가슴속에서 필사적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입구를 지나 석조 건물인 도서관에 발을 딛자 금방 깨달았다. 『공기가 맑은데?』『다른 건물과 달리 꼼꼼히 청소되어있어. 거기 책상 좀 봐. 출입대장이 놓여 있고, 잉크가 마르지 않은 데다 펜의 날개도 매끈해...
눈을 뜨자 짐마차가 흔들리고 있다. 한겨울의 고비를 넘어가는 날이자 내뱉는 숨이 아직도 흰 시기였지만, 날씨가 맑고 바람도 없어서 석조 건물 안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낫다. 깃털이 한 장씩 얼굴 위로 내려오는 듯한 햇살 아래에서 한가로이 누워 있으면 천천히 움직이는 짐마차가 내는 단조로운 소리와 진동 탓에 금방 졸음이 몰려온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 나는 두 뺨을 손으로 친 후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뚜둑, 다닥, 같은 소리가 난다. 오른쪽 어깨에 납을 씌워놓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밤새도록 모기 눈알을 채집하는 것과 같이 세밀한 작업을 했던 탓이다. 『태평한 모습이야.』 마지막으로 큰 하품을 하고 있자, 마부석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마..
※ 해당 번역본은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가 한국 정발이 확정 되면 비공개로 처리될 예정입니다. 될리가 없지만 서고에는 114권의 책이 있다.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고대철학자가 저술한 철학서, 신학서, 성전주해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모험담, 수많은 연대기들…. 로 이루어진 114권 모두를 소개하는 건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모든 책이 이곳에 있다는 뜻이며, 나는 이 모든 책을 읽었다. 그리고 얻은 것은 만족감이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세계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을 것이고, 들은 적 없는 장소도 없을 것이며, 가슴 두근거리는 역사도, 읽은 적이 없는 문장도, 동경하지 않은 영웅도 없을 것이라..
작가 후기 잠들기 전 책을 들었을 때,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귀여운 생물이 존재해 느긋한 기분을 느끼며 잠든다. 그런 책이 필요해서, 직접 썼습니다. 하세쿠나 이스나입니다. 반쯤 농담이지만 쾌활한 여자아이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책을 쓴 건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뮤리가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진 경위는 저 자신도 놀라울 정도입니다. 같은 달에 출시한 이 책의 원작 시리즈인 『늑대와 향신료 XVIII Spring Log』에 수록될 첫 단편을 쓸 때까지만 해도 뮤리에 대한 내용은 쓰지도 않았고, 설정조차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 콜과 뮤리가 자신들이 쓴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간접적인 묘사를 쓰는 순간, 그 시점에서 윤곽이 잡히며 작중 편지 너머에 이미 뮤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 밤의 그늘이 드리워진 어둠의 한가운데 손을 문지르며 우물이 있는 정원으로 나왔다. 이곳에서 며칠 동안 끙끙 앓아 잠을 푹 잔 터라, 이처럼 일찍 일어나는 것은 오랜만이다. 머무른 곳은 상관(商館)으로 『시간은 금』이라는 상인의 말이 와 닿았다. 우물 옆, 기대어져 있는 막대기를 사용해 우물 바닥에 붙은 두꺼운 얼음을 깼다. 길어 오른 물은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얼굴을 씻으면 칼로 깎아내는 것처럼 느껴져 졸음이 달아났다. 얼굴을 닦고 차가운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신 후 하늘을 바라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이 상쾌했다. 언 땅에 무릎을 꿇었다. 모직 카펫을 깔 필요는 없었다. 추위와 고통을 감내해야 신에게 바치는 기도에 뜨거움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평온한 공기에 언제까지나 기도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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