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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서막

(◉◞⊖◟◉) 2017. 5. 20. 01:35

※ 해당 번역본은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가 한국 정발이 확정 되면 비공개로 처리될 예정입니다. 될리가 없지만






[각주:1]에는 114권의 책이 있다.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고대철학자가 저술한 철학서, 신학서, 성전주해서[각주:2],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모험담, 수많은 연대기들…. 로 이루어진 114권 모두를 소개하는 건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모든 책이 이곳에 있다는 뜻이며, 나는 이 모든 책을 읽었다.
 그리고 얻은 것은 만족감이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세계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을 것이고, 들은 적 없는 장소도 없을 것이며, 가슴 두근거리는 역사도, 읽은 적이 없는 문장도, 동경하지 않은 영웅도 없을 것이라며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자신이 모르는 재미있는 일들이 없어져 버렸다면, 성실하게 매일 눈을 뜰 필요가 있을까? 모험을 끝낸 모험가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작업을 하기 위해 받은 작은 단검을 훑어보았다. 귀중한 양피지를 재사용해야 했기에 그것에 기록된 문자를 긁어내는 도구로, 쉽게 말해 점철된 이야기를 지우기 위한 도구다.[각주:3]
 일은 힘들고, 어른들은 엄격하며, 단순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세상이다. 단조롭고 같은 행위의 반복인 일을 변변한 휴식도 없이 수십 년 동안 계속해왔다. 그 말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들도 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들어 올린 그 직후였다.
 갑자기 서고의 문이 열리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레리우스의 6보격시[각주:4]를 읽을 줄 안다고? 교회 문자로? 끝내주는데!』[각주:5]

 쿵쿵거리며 신성한 서고에 들어온 누군가가 경박한 어조로 지껄여댄다. 그것만으로도 옛 지식이 집대성된 책들에 흠이 생기고 양피지를 묶은 끈이 느슨해질 것만 같다.
 거기다 에이레리우스의 6보격시!
 그것은 교회 문자의 기초 문법서로 사용되는 유명한 고대 시인의 책이다. 교회 문자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그 책을 읽기 때문에 찾기 힘든 물건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것도 모르는 어른이 찾아온거냐?라는 모멸감의 시선을 보내려 돌아서다 흠칫 했다.
 거기에 있는 것은 특색있는 칠흑의 밧줄을 차고, 검은 옷 위에 빛나는 금목걸이를 찬 이단심문관이었다.

『이런, 당신입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상상해본 이단심문관과 달랐다. 이단심문관은 경험과 체력을 겸비한 남자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인물은 형이라고 부를 것 같은 청년이었다. 어설픔조차 보이는 동안(童顔)의 이단심문관은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나 왜? 여기에는 분서[각주:6]에 해당하는 마법서[각주:7]의 종류가― 라는 생각이 들자 몸이 떨리며 그 순간 깨달았다.
 분서에 해당하는 마법서?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그것을 읽은 적이 없다. 혹시 이 세상에는 아직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

『하하. 현자의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하지만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러시죠? 이런,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대(大) 우즈워스의 【황금의 나라】[각주:8]이군요. 우즈워스가 여행을 한 변방의 나라에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다죠. 후추와 육두구가 흐르고 있다는, 낙원으로 이어지는 강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만약 그런 강이 실제로 있다면 눈에 상처를 내서라도 담고 싶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상상 해본 적 있으신가요? 아니,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처럼 똑똑한 소년이라면 그런 상상은 안 했을 거 같네요. 지금 당신은 그 책을 읽은 직후이기에 분명 이렇게 생각하겠죠. 아, 모험은 이제 끝나버렸다!』

 나는 뜨끔했다. 공포와 처형의 상징인 이단심문관의 으리으리한 옷차림에 압도된 것도, 너무나 경박한 말투에 어리둥절한 것도 아닌, 그 녀석이 내 마음속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꿰뚫었기 때문이다.

『【황금의 나라】는 사실 함축성 있는 제목이죠. 저도 열중하고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32년간의 대 모험이 끝나는 순간의 1줄을 읽었을 때 갑작스러운 허탈감이 오더군요. 그렇지만,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이단심문관은 즐겁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낙담할 필욘 없다는 걸.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내가 32년을 써도 다 읽지 못할 책들이 있으니까요!』
『네?』

 무심코 되묻자, 이단심문관은 빙긋이 웃었다. 의도한듯 등을 곧추세우더니 왼손을 등에 대며 에헴, 헛기침을 한 후 무섭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아직 모험을 시작했을 뿐이며,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교회의 총본산 류트크리스에 있는 교황청 도서관[각주:9]의 장서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반입해서가 아닙니다. 820여 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즉 목록을 만들기 위해서 도서관의 깊은 곳과 마주할 때마다 잊혀졌던 책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아참, 알고 계신가요? 새 책은 주로 낡은 책의 안에서 많이 발견된답니다. 책의 두께를 조절하기 위해 삽입된 제1장이, 실은 수백 년 전의 철학자가 발표하지 않은 논문인 경우도 있었죠.[각주:10] 세계는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오래된 교회나 수도원의 도서관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 생각 끝에, 포도주를 마시고 올리브를 먹으면서 철학을 말했던 태고의 현자들[각주:11]이 쓴 편지의 사본의 사본의 사본을 자세히 읽어보자 거기에서 언급된, 지혜를 가진 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문헌들이 실은 극히 일부 밖에 발견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신이 세상을 만든 이래, 이야기되거나 기록된 지식이 정말 일부분 밖에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오! 이 무슨 나태함! 이 무슨 낭비인가! 무슨 말이냐고요? 사람의 머리를 만든 것이 신이시기에, 머리에는 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머리로 생각해낸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이 만든 우리라는 고귀한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계는 무한히 확대되고,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빠르게 그리고 꾸준히, 두려워말고 돌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의 발자국을 뒤쫓아 신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일각의 시간도 지체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책은 영원하지 않고 불이나, 종이를 파먹는 벌레들, 곰팡이, 쥐 또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쉽게 먼지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무수히 많은 책이 무지와 무관심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년이여! 저는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실로 훌륭한 인재입니다!』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하던 이단심문관은 휙 하고 발길을 돌렸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케케묵은 사고방식을 가진 무인(武人)이나 엄격한 삶을 지향하는 성직자 가운데는 책을 읽으면 바보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각주:12], 꼭 눈앞의 사람이야말로 책을 읽어버린 바람에 어딘가 모자라게 되어버린 사람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가슴 속에 뭔가 치솟을 것 같은, 울고 싶어진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뭐하고 있는 겁니까! 일어나세요!』

 평범하지 않은 이단심문관은 마치 축제를 기다리는 아이와 같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13만 7,000권의 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세계의 지식 파수꾼이 될 것입니다!』

 114권의 책을 읽고 세계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온갖 분야의 책들이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머리에는 어른들의 114회분의 인생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3만 하고 7천 권. 그것은 쉽게 상상하기가 힘들다.
 문득 자신도 모르게 채광창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햇살이 눈부시도록 쏟아지고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것은 넓디넓은 하늘 중 쥐꼬리만큼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무작정 뛰쳐나갔다.
 자신이 모르는 것, 본적 없는 것, 경험하지 못한 즐거운 일들.
 이 좁은 서고 저편에, 그것들이 잔뜩 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1. 書庫. 도서를 보관하기 위한 방이나 건물. [본문으로]
  2. a Bible commentary. 성경적 교리를 시대의 필요에 맞추어 새롭게 풀어 쓴 책을 말한다. [본문으로]
  3. 중세 당시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수정해야 할 부분이 생겼을 때 단검으로 잉크를 조심스레 긁어낸 후 그 자리에 우유, 치즈, 라임의 혼합물을 이용해 채워넣었다. 책으로 제작되는 양질의 양피지는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6보격(Hexameter)은 서구시의 기본 음률 중 하나다. 1보격(Monometer)부터 8보격(Octameter)까지 있으며 이들은 강음절과 약음절이 결합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풋(Foot)이 시 한줄(Verse)에 몇 개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본문으로]
  5. 작중의 교회문자는 라틴어를 의미한다. 중세 초기 문맹률은 90%(10세기 초반)에 달했으며 이에 라틴어를 할줄 아는 이들은 지식인으로 분류되었다. [본문으로]
  6. 체제 통제를 위해 금지 서적으로 지정된 책을 불태우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7. 고대~중세에는 마법서라는 음지의 책들이 존재했다. 12세기 무렵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The Book of Abramelin(한국 정발명 “아브라메린의 신성 마법”), 룬문자로 저술된 Galdrabók(아이슬란드 어로 “마법책”)등이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8. 모티브가 된 작품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본문으로]
  9. 바티칸 시국에 위치한 교황청 도서관이 모티브. [본문으로]
  10. 15C까지는 종이의 존재가 귀하던 시기였기에 파지를 이용해 이면지로 붙여쓴 경우가 많았다. 유럽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배접지(褙接紙)에 이런 파지들을 이용했는데, 유명한 것으로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의 배접지로 사용된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가 있다. [본문으로]
  11.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의미한다. 포도주와 올리브는 고대 그리스의 주요 특산품이었으며 이 때문에 서양문학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철학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포도주와 올리브를 언급한다. [본문으로]
  12.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인해 6세기 이후 기독교인은 배움을 전적으로 포기한 자들을 영웅으로 칭송했었다. 또한 무인들은 기사도 정신에 근거해 “무(武)”를 숭상하는 것이 지나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당시 기사(=귀족)들은 무지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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