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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제2막

(◉◞⊖◟◉) 2017. 6. 3. 22:35


랜든 수도원 도서관 입구 위에는 이빨을 드러낸 악마 형상의 조각[각주:1]이 새겨져 있어서 방문객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앞쪽부터는 지옥이라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서관에 나쁜 마음을 먹고 침입해 장서를 훔치지 말라는 경고를 위한 것이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책을 훔치는 성직자들의 이야기는 심보가 고약한 귀족들이 즐겨 말했다.
 태평한 쟈드는 악마상(像)을 찬찬히 아래에서 올려다봤지만 나는 책의 매입을 위해 온 것이지 도둑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핑계를 가슴속에서 필사적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입구를 지나 석조 건물인 도서관에 발을 딛자 금방 깨달았다.

『공기가 맑은데?』
『다른 건물과 달리 꼼꼼히 청소되어있어. 거기 책상 좀 봐. 출입대장이 놓여 있고, 잉크가 마르지 않은 데다 펜의 날개도 매끈해. 부지런 했나 봐.』
『출입대장이라면, 명부?』

 굳게 닫혀있는 곳에 손님의 명단이 있다는 것은 어떤 누군가가 왔을 때는 문을 열어줄 생각이었던 것일까. 어떤 인물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등에 있는 소녀를 내려놓아야 했다. 빈약한 나는 이미 체력의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근데, 쟈드. 이런 곳에서 생활했다는 게 사실일까? 수도원이면 더 괜찮은 숙소가 있지 않아?』

 허리에서 떨어질 것 같은 소녀를 몇 번이나 다시 고쳐 업으며 말했다.
 세계에는 기원이 있듯이 수도 생활에도 개조[각주:2]라는 기원이 있어서, 대부분의 수도원은 육백 년 전 위대한 현자가 정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건물 배치도 정해진 방식이 있다는 내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더군다나 일반적인 수도원에는 순례자용 숙소[각주:3]가 있을 것이다.
 굳이 이런 곳에서 기거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쟈드가 복도 한쪽에 있는 방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여기서 자고 일어났을 거야. 침대도 있고.』

 쟈드가 안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이 도서관은 건물 분위기로 보아 성당 일부를 개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방은 본래 성전을 필사하는 필경실로, 필경실에 침대가 왜? 라는 의문부호가 떠오른다. 다만 쟈드가 중얼거리는 것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도대체 뭘까라고 미심쩍어 할 새도 없었다.

『뭘까?』

 역시 원랜 성당이었던 것 같다. 필경실[각주:4]이라는 강판이 달린 문을 지나자 매우 밝고 넓은 방이 있다. 외부와 접한 벽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서 엄청난 돈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각주:5] 꽤 넓어 보이는 방으로 큰 판형의 책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책상이 6개나 7개는 쉽게 들어갈 정도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는 책상과 독서대가 나란히 마주 보고 있을 뿐 나머지 공간에는 필경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 놓여 있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큰 유리 창문 아래에 위치한 침대와 그 옆에 허리 높이 정도의 서랍장이 있었고, 그 위에 놓여진 촛대와 성모상을 놓아 간이 예배대처럼 꾸며놓은 것이었다.

『도서관은 책 읽는 장소 아냐?』

 쟈드가 말했다.
 하지만 침대가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양모 덩어리와 갈퀴가 흩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무엇에 쓰였는지 불분명한 목재와 나무를 자르거나 깎은 것으로 보이는 톱과 망치가 나란히 있다. 하지만 정은 녹슬어 있었고, 톱은 부러져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불에 탄 돌과 더미채 묶여있는, 잘게 뜯어 놓은 풀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정리 되지 않은 방인 거 같다.』

 쟈드의 말이 방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일단 필경실 처럼 독서대와 글을 쓰는 책상이 있고 거기에 큰 책이 펼쳐져 있어서 사본작업이 한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방의 모습에 당황하며 엎고 있는 소녀를 쟈드의 도움을 빌려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한숨을 돌려 다시 방을 바라보았다.

『왠지, 이 방에서 묘한 느낌이 들지 않아?』
『묘하다니. 이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있을까.』

 어수선한 헛간처럼 보여 확실히 묘했지만 내 말뜻은 그것과 조금 다르다.

『그게 아니라, 이 방에서 지내기 시작한게 최근이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음. 아무래도 이 수도원에 아무도 살지 않은 것은 2달 전인 거 같은데. 살기 좋은 이곳에서 머문 게 아닐까?』

 귀찮아하듯 쟈드가 말했지만, 그것은 분명 이상하다.

『쟤 혼자 어떻게 이런 침대나 정리함을 두었을까. 독서대와 글 책상을 움직이는 것도 무리일 텐데.』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곳에서 거주했던 걸까. 우리 상회에도 꼬마 도제 중에서는 창고나 복도같이 비어있는 곳에서 재우잖아.』
『그렇지만 우리가 어릴 때 일을 생각해보면 땅바닥이나 복도 안쪽에서 지냈지, 이렇게 가구가 좋은 곳은 아니잖아? 게다가 창문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이렇게나 밝아. 개인 방이 이런 환경이라면, 모두가 살고 싶어 할걸.』

 그 말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맞아, 가장 이상한 것은 이곳이 개인 방이라는 거야. 600여 년 전에 정해진 수도원의 계율에선 집단생활이 기본이야. 상회에서도 개인 방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스승님들뿐이잖아. 그런데 여기는 침대가 1개뿐이지. 그렇다는 건 이 아이는 특별대우를 받은 거야. 아마도 귀한 신분의 아이인거 같다.』
『그런 거 같아.』

 쟈드는 침대에서 괴로워하는 얼굴로 눈을 감은 소녀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라는 거지? 이 녀석. 』

 그렇게 묻자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방을 빙 둘러보던 쟈드가 옷장에 손을 대자 나는 당황하며 멈춰 세웠다.

『야, 야. 명색이 여자아이의 방인데 마음대로 손대는 건 안 되잖아.』

 쟈드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깔깔 웃었다.

『기사도 정신이구나.』
『그, 그런게….』

 내가 코를 문지르자, 쟈드는 덧붙였다.

『냄새는 맡았으면서.』

 심장이 멈춘 것 같은 충격이 왔다.

『그, 바, 아, 바보야, 그거랑 다르다고!』
『괜찮아, 괜찮아. 여러 취미가 있으니까. 오히려 책과 사귀던 네가 현실의 여자에게도 제대로 된 흥미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심하고 있어.』
『다, 다, 다, 닥쳐 쟈드! 이 떠돌이 개자식아!』

 내가 싸우려 해도 체격으론 쟈드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가볍게 무시를 당한 것이 분해서 구시렁구시렁 대고 있을 때, 문득 쟈드가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기회를 놓칠세라 주먹을 쥐고 힘을 실었다.
 직후였다.

『으…. 아, 응?』

 내 귀 바로 옆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솜털이 날라오듯 들려왔다.

『누구? 다, 당신들. 뭐야? 어?』

 고개를 돌려 보자, 그 여자아이가 눈을 뜨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자 자그마한 체격에서 허무함과 부드러움이 어우러졌고, 가녀림과 귀여움이 보였다. 말투에서는 지금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 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소녀답게 보였기에 나는 순간 얼어버렸다. 오래전에 읽은 궁중 의례의 책에는 숙녀를 앞에 두고 신사가 해야 하….[각주:6]

『아니, 우, 우리들은….』

 내가 횡설수설하고 있자 쟈드가 격렬하게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야, 떨어져.』

 그리고 과장된 모습을 하며 옷매를 다듬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이단심문관을 상대로 너무 무리하는 바람에 네가 기절해 버렸기에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야.』
『뭐?』

 그 물음표는 여자아이뿐 아니라 나도 함께 쟈드를 향해있었다.
 옮겨온 건 난데?

『그, 그런 거야?』
『그래.』

 쟈드가 그렇게 대답하자, 여자아이는 자신의 멍청함을 뉘우치듯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뭐, 함부로 들어온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여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내 윤리에 어긋나는 거라서 말이야.』

 너무나 뻔뻔한 모습에 나는 씁쓸했지만 쟈드는 당당했다.
 역시나 여자아이는 귀족 출신인 것 같았다.

『일단은…. 감사를 표해둘게.』

 마을을 떠돌아다니는 부랑아들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

 쟈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옮긴 것은 분명히, 나다.
 그렇지? 라고 쟈드를 바라 봤지만 무시당했다.

『어, 그래서 네 이름이? 이 수도원의 꼬마 일꾼인 척했지? 게다가 이 방은 어수선하지만 훌륭한 개인실이야. 집단생활이 기본인 수도원에서 너만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거지. 도대체 넌 누구야?』

 그것도 내가 알아낸 건데, 라는 생각을 하며 쟈드의 뻔뻔함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것이 흔히 듣던, 자기주장을 무기로, 싸움을 이겨내야 하는 상인들의 뱃심이라는 건가. 공방에서 책에 달라붙어 꾸물꾸물 하는 자신이 얼마나 철부지였던 가를 되새기게 된다.

『한꺼번에 묻지 마….』

 소녀는 아직도 어딘가 아픈지 미간에 주름을 보이며 눈을 꽉 감았다. 두통을 버티고 있는 듯하다.

『이름은?』

 그러나 쟈드는 무시했다. 여자아이도 쟈드의 성격을 눈치챈 것 같다.
 싫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항복을 선언하듯 말했다.

『…. 클레어.』
『그게 다야?』
『?』

 클레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소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쟈드를 바라보았다.

『너 귀족이잖아? 본명은?』
『어, 어째서 그런 걸?』
『왜 그래?』

 쟈드는 자신의 귓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난 말이야, 뭐든지 꿰뚫어 보거든.』

 이봐! 라고 생각했지만, 클레어는 쟈드의 말을 믿어버린 것 같다.

『단순한 심부름꾼인 줄 알았는데….』
『대(大) 지델 상회 전속 상인 쟈드라고 한다. 드디어 자기소개를 할 수 있게 됐네. 기억해두라고.』
『….』

 클레어는 침대 위에서, 마치 전쟁에 패해 적들의 성에 유폐된 공주처럼 힘없이 입을 열었다.

『클레어…. 클레어 · 엘 · 카르디소=샬리뇨.』

 길다. 첫인상은 그렇게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역시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카르디소는 어딘가의 지명이었을 터. 이름 사이에 지명이 들어간 것은 그 지방을 지배해온 명문가 출신이라는 것이다. [각주:7] 거리에서였다면 우리 같은 말단과 대화를 하지 않을 신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클레어가 정말 귀족이어서 이 방에서 살고 있다면 작업 도중이었던 사본은 클레어의 책이겠지. 그렇다면 책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어쩌면, 혹시…. 숨을 들이마셨다.
 책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나는 그 가능성에 안절부절못했지만, 곧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사본의 제작은 글자를 베껴내는 작업이고, 그렇기에 사본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중에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기대하다 어긋날 경우를 떠올려 보면 냉정해야 한다.
 그리고 쟈드 때문에 분위기가 경직된 상황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주저하고 있자 쟈드가 "흠"이라며 재밌다는 듯이 코를 매만졌다. 그야말로 오만한 태도에, 클레어는 이다음에 무엇을 물어볼까, 싫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다.
 말을 꺼내려면 지금이다.

『어, 어이 쟈드.』

 나는 뒤에서 쟈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렇게 심문하듯이 하지 마.』
『심문 하는 게 아니야. 다만 이곳에 무단으로 정착한 사람이 거지라면 위험하잖아.』
『누가 거지야! 이 무례한 녀석!』

 말투에선 고상함이 느껴졌지만, 꼬마 아이처럼 분장했을 때에도 보였던 저 눈빛은 타고난 강한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쟈드를 달래서 온화한 대화 분위기를 만들고, 그 후에 책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만 나는 클레어의 박력에 무심코 뒤로 물러서 버렸는데, 쟈드는 약한 바람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얼굴을 움직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화나면 이쁜 얼굴이 망가져 버리잖아.』
『뭣!』

 클레어는 그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고, 나도 쟈드의 그 노골적인 말투에 질려버렸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어버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다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클레어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쟈드가 박장대소하자 눈썹을 치켜뜬 클레어가 왕겨로 채워 넣은 베개를 던졌다.
 하역장에서는 나보다 무거운 짐을 내던지고 받는 쟈드이기에 가볍게 받아냈다.
 그리고 문득 그것을 나에게 건네줬다.

『뭐, 뭐야. 나는 심부름꾼이 아니얏!』

 그렇게 주장하자, 쟈드가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냄새를 맡으려면 지금이야.』

 나는 몸을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다면, 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와 눈이 마주친 클레어가 뭔가를 깨달은 듯이 눈을 크게 떴기 때문이다.

『뭐, 뭐라고? 뭘 할 셈이야?』

 좁은 방에 여자가 하나, 남자가 둘. 게다가 넓은 공간에서 도움을 청할 상대도 없다. 클레어는 겨우 그것을 깨달은 듯, 벽에 등을 파묻고 좁은 침대 위에서 뒷걸음질 쳤다.

『아냐, 자, 잠깐! 이봐 쟈드!』

 나는 쟈드의 멱살을 잡았지만, 쟈드는 깔깔 웃어댔다. 여자 앞에서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필. 클레어가 기절한 사이에 했던 일을 신께 솔직히 말해야지.』
『읏.』『읏.』

 전혀 다른 두 소리가, 확실히 울렸다.
 하나는 내 것이고, 하나는 클레어의 것이다.

『그,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클레어의 냄새를 제대로 맡았잖아.』

 그것은 사실이라 강하게 반박하진 못한다. 하지만 사실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내가 울 듯한 얼굴로 클레어를 보고 있자, 클레어는 나를 기분 나쁜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잘 좀 들으라고! 성 루미나리오스! 은사 판돌스! 시데온, 하미리기오스!』
『뭐야,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좋은 거지? 좋잖아. 어떤 것도 분명히 해야 탈이 안 난다고.』

 쟈드가 내 어깨를 탁탁 두드린다. 혹시 심술 궂은 게 아니라 친절을 베풀고 있는 걸까? 나는 부끄러움과 분노, 혼란으로 가득 차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았다.

『성인전?』[각주:8]

 거기에 문득 서늘한 바람처럼 클레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연못에 머리부터 떨어져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혼란스러웠던 것 같았던 나는 마침내 수면에 머리를 내밀며 외쳤다.

『그래! 그거야!』
『성인전? 그게 뭐야? 기절한 여자애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냄새를 킁킁 맡는 것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

 겨우 이쪽의 진심을 전달했지만 클레어는 자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이쪽에서 보고 알 정도로 소름 끼쳐 하고 있었다. 확실히 좀 기분 나쁠 순 있는데 그렇게 싫어할 건 아니잖아, 라며 울상을 지었던 나는 명예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넌 좀 닥쳐! 그래, 그 성인전 말야!』
『….』

 클레어는 아직 나를 경계하며 보고 있었지만 잠깐 얼굴을 돌리며 생각을 하듯 턱을 잡아당겼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나를 보았다.

『호, 혹시 은수자의 달콤한 향기?』

 나는 교양있는 여자의 훌륭함에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싶었다.

『그, 그래! 그래! 그거야! 결코 뒤가 구린, 그런 걸 한 게 아니야!』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것은 진실이니까. 절대로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적 호기심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신께도 비밀로 해야 할, 그런 일은 아니다.

『은수자의….』

 혼자 따돌려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쟈드가 언짢은 듯 말했다. 
 그것에 대답한 것은 클레어였다.

『엄격하게 금식을 한 성인의 전기에는 반드시 있는 적혀있는 단어야. 하늘에서 신의 심부름꾼이 내려올 무렵이면, 성자의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감돈다고 알려져있어. 수도원에서 몰약[각주:9]으로 향을 피우면 그런 기분에 젖을 수 있다고 해. 나도 느껴보고 싶었지만….』
『그래! 그거야! 하지만 가까이에 단식을 하는 사람이 없었어…. 다만 언젠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변호했다.

『그, 그러니까 나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거의 눈물을 터트릴 정도로 호소했다. 미움받아버리면 책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니까.
 그리고 그 필사적인 호소는 클레어에게도 통한 것 같았다.
 클레어는 살며시 자신의 옷깃을 잡고 냄새를 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지만.』
『정말이야!』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절규가 괜찮았다는 쟈드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럼,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라는 거야?』
『이, 이 말 궁댕이 같은 놈아!』

 마침내 이해한 듯한 쟈드의 엉덩이를 걷어찼지만 여전히 웃을 뿐이었다.

『아, 아무튼 좋아. 변명에 묘하게 신경을 썼구나.』
『!』

 클래어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성모상으로 착각할뻔 했다.

『하지만, 그건 돌려줬으면 해.』
『앗!』

 클레어의 베개를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결백을 나타내기 위해 재빨리 던져냈다. 클레어는 베개를 받자 순간 뭔가 붙어있지 않은 지 확인하는 그런 모습을 하더니 매달리듯 껴안았다. 그런 것을 보면 가냘픈 여자아이지만 눈빛은 소년으로 분장했을 때 그대로다.

『그래서, 당신들은 누구야?』

 쟈드는 웃는 것을 멈추더니 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냥 상인. 아까 말했었잖아?』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이 녀석은 필. 서적상의 제자야.』

 쟈드에게 소개받은 나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 했지만, 클레어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적…상? 책은 만드는 것이지 파는 것이 아니잖아?』
『나는 안개를 파는 일이라고 부르고 있어. 책을 좋아해서 미지의 책을 사들이고 장사하면 책들도 읽고 돈도 벌고 일거양득이라는, 어린애나 할법한 발상이지. 뭐라고 해줘.』
『….』

 그 말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헤아린 듯, 클레어가 슬픈 눈으로 돌아본다. 벌레를 보는 듯한 눈도 싫었지만, 이쪽은 더욱 싫다. 게다가 쟈드까지 함께 슬퍼하는 것에 나는 정말이지 울뻔했다.

『괜찮아! 나는 이 수도원의 도서관에 있는 미지의 책들을 사들이고 서적상이 될 거라고!』
『힘내라.』

 그런 쟈드의 격려를 받자 등이 옆으로 도망갈 만큼 마음이 상했다.

『미안하지만.』

 클레어가 차갑게 말했다.

『여기 책은 파는 게 아니야.』

 협상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클레어의 굳은 의지는 곧바로 느껴졌다.

『물론. 쉽게 팔아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
『파는 일은 절대 없어.』

 설령 힘으로 밀어붙이더라도 분명 틈을 발견하고 이쪽의 숨통을 끊어버릴 것이다. 그 정도의 기백이 담긴 시선을 바라보자 나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다른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했을 나라도 책에 관한 거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책 이야기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우선은 책의 매입이다.
 쉽게 물러서지 않고 클레어를 노려보자 클레어도 당당히 맞서 노려본다.

『그러고 보니 그 이단심문관은 뭐 하고 있어?』
『어?』

 목소리를 낸 것은 클레어였다.

『클레어를 끌어내고 문을 비집고 들어간 것도 상당히 능숙했잖아. 그 남자 정상이 아니야. 게다가 책 중에서 그런 것도 있지? 장식에 보석이 사용된 것 말이야. 괜찮으려나.』

 쟈드가 태평하게 말하는 옆에서, 클레어는 머리에 피가 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모포와 베개에 걸려 머리부터 떨어졌고, 짐을 받듯 쟈드가 받아냈지만 클레어는 귀찮다는 듯 밀어냈다.

『진정하래도.』
『진정하라니, 어떻게!』

 침대에서 떨어진 후 쟈드의 가슴을 들이받고 일어서더니 방을 뛰쳐나갔다.
 나와 쟈드가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가자, 클레어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회랑의 출입구 쪽으로 가지 않고, 반대 방향인 성당에서 신도들이 모이는 큰 회랑에 위치한 문을 열었다.
 곧바로 문 안으로 뛰어들자 우리는 그녀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의 충격은 말로 다 하지 못한다.
 그곳에는 쟈드도 압도될 것 같은 즐비한 흑빛의 서가와, 서가에 몰려온 박쥐처럼 빽빽이 놓인 책들이 있었다.
 그 장관을 보고 말을 잃은 나는 클레어의 머리에서 펑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무시하고 얼떨결에 그 중 한 권을 손에 들었다. 쓸데없는 장정이 생략된 단순한 양피지 묶음 같은데, 초고[각주:10]에서 느껴지는 억셈마저 느꼈다.
 하지만 한 페이지를 넘긴 순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해 할 수 있었다.
 저자의 이름은 성 안브로시우스. 제목은 어디에도 없지만 이름은 들은 적이 있다. 참새도 설교했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열성적인 성직자로 설교를 너무나 열심히 한 나머지 이단으로 의심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각주:11]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양이나 참새에게 신의 위대함을 설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고양이나 참새에게 설교할수록 "이렇게 신에게 충실하지만 신은 어째서 자신에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안브로시우스는 그 물음에 신의 헤아림은 사후에 보상을 받기 위해 침묵하고 있다, 고 결론 내린 것 같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정직하게 살던 곳에서 불합리한 불행에 휩쓸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상에서 안브로시우스의 결론은 참으로 든든한 울타리인 것이다. 실제로 그는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선 희망을 보여준 성자 중 한 명일 것이다.
 다만 안브로시우스가 떠올린 질문은 정확한 시각에서 보면 신에 대한 의심으로 직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본인은 성인으로서 대우받고 있지만, 그의 저서 일람은 대부분 금서로 취급하고 있다. 교황청 도서관에 던져졌던 나조차 읽은 적이 없다. 그 이름은 책 속의 인용으로만 보았다.
 그런 책을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나는 환희에 부르르 떨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문득 알아차렸다. 여기에는 아직 막대한 장서가 있다. 우연히 손에 쥔 이 책만이 귀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 없다!
 나는 고개를 들며 이 도서관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클레어는 알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클레어를 쫓아 이곳에 온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황급히 책을 돌려놓고 책의 무리 속을 곧바로 관통하는 통로로 나가자 그 중간쯤에서 클레어는 맥없이 앉아 있었다. 쟈드도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뒤늦게 2명의 옆에 서서, 그들이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흑의의 이단심문관은 천장의 작은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빛 아래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교회의 신앙과 권위의 올바름을 단두대에 올려놓는, 흑의를 두른 그 사람은 책상다리를 하고 만면에 미소를 띈 채 우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여기는 훌륭한 책이 엄청 많을 테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아브레아가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듯 했다.

『아.』

 라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도서 목록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는 다시 책의 세계로 돌아갔다. 책을 몰래 훔치고 가져갈 것 같은 잔재주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 남자가 책을 간절히 원할 때는 수도원을 통째로 훔쳐가는 짓을 할 것이다.

『뭐, 뭐야….』

 맥이 빠져 허리가 나가버린 것만 같은 클레어는 살짝 눈물을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잘 생각해보면 쟈드의 짐마차가 아니면 두툼한 책들을 안고 이곳을 떠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게다가 기이한 이단심문관인 코레드 아브레아는 지금 책을 읽는데 열중하고 있다.
 내버려 두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우리는 다시 클레어의 방으로 개조된 필경실에 들어왔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이 수도원의 상황이다. 나도 아브레아 못지않게 서고에 큰 미련이 있지만 책의 매입과 관련된 이쪽이 중요해 서고를 뒤로 하고 돌아왔다.
 클레어는 역시 귀족 출신답게 필경실에 돌아오자마자 자연스레 나와 쟈드에게 포도주를 대접했다. 무슨 약초와 물을 섞은 듯 다소 이상한 냄새가 낫다. 나는 술을 잘 못 하지만 서고가 궁금해서 어쩔 수 없이 빨아 마시는 정도였으나 쟈드는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다만 쟈드도 뭔가 생각이 있는 건지 입을 열지 않았고 클레어는 지친 듯이 침대에 걸터앉아있다. 서로 상대의 태도를 엿보고 있었겠지만 나는 역시 아무래도 시선이 책으로 향한다.

『이거…. 전부 네가 필사하는 거야?』

 클레어가 침대 위에서 귀찮은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뭐.』
『아, 아니….』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느끼며 주저했지만 책에 대한 호기심은 용트림처럼 치솟아 올랐다.

『이, 이거…. 그거네, 철학자 나피클스지?』

 그러자 클레어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어. 알아?』

 나는 그 반응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유명한 구절이니까. 하지만 그…. 수도원에서 나피클스 같은 걸 읽어도 괜찮아?』

 간이 예배대에 놓여진, 성모상과 옷장에 새겨져 있는 있는 세공물을 바라보던 쟈드가 참견했다.

『뭔데? 그것도 야한 거야?』
『그런 거 아냐.』

 반쯤 감긴 눈이 노려보자 그 부분만은 확실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보통은 괜찮다는 표정을 짓지 않을까.』

 나는 확신했다. 클레어는 제대로 책을 읽고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교양을 겸비한 여자아이. 그것은 요정이나 엘프의 종류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것에 기뻐서 발이 지면에서 떠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제목은 "행복 탐구의 책"[각주:12]이었지?』
『좋은 제목 아닌가?』

 쟈드의 맥락 없는 말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냉정하게 반박했겠지만 미소를 지으며 실수를 정정해줬다.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만, 수도원은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곳이야.[각주:13] 고해성사의 뜻을 담아 필사로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 옆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듯한 책을 읽는다면 조금 위험하잖아.』
『음? 하지만 교회에서 기도한 후에 주점으로 향하기도 하잖아.』
『벌 받을 거야.』

 클레어의 멸시에 쟈드는 왠지 흐뭇해했다.
 나는 흥이 좀 깨지긴 했지만, 책 이야기가 나온다는 기쁨에 녹아내릴 것만 같다.

『무엇보다 이것은 태고의 다신교 시대[각주:14]에 나온 책이야. 그것들은 금서로 취급되어 있지. 그래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문법을 배우는 책으로 활용하기에 묵인해주고 있지만. 어쨌든 글이 훌륭해. 더는 퇴고가 필요 없는 문장이 있다면 바로 이거야. 후대의 시인이나 신학자 모두가 인용하는 책 중 하나로 꼽히고 있어.』
『흐응?』

 물론 쟈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게다가 클레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정말 상인이야? 마을에서 살았던 적도 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어. 지위가 있는 사람조차 대부분이 무지하고 천했는데.』

 여자아이가 빤히 쳐다보면 그 자체로 얼굴이 간지럽다. 게다가 나는 겨우 깨달았다. 클레어는 화가 나 있지 않으면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며 너무나 귀여웠다. 게다가 지금은 그 큰 눈에 깊은 교양의 색이 느껴져서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런 아이가 자기가 말하는 책 이야기에 감탄하고 있다!
 나는 하늘에 붕 뜬 기분으로 가슴을 치고 말았다.

『뭐, 뭐! 일단 서적상 수습이니까!』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클레어는 갑자기 시선을 피하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 그래. 도움이 되지 않는 것만 알고 있구나.』

 고래를 잡는 작살로 가슴이 꿰뚫린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고 나의 이런 모습을 비웃는 쟈드를 향해 노려볼 힘도 사라졌다.
 클레어는 책을 싫어하는 건지도 모른다. 수도원에서는 읽고 쓰는 훈련을 강제하는 데다, 사본 제작의 경우엔 엄청난 인내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고행으로 취급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각주:15]

『하지만, 뭐. 마냥 색욕에 빠진 쓰레기는 아니네. 그 점에선 안심했어.』

 좋아해야 할 말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하아, 라고 한숨을 쉬고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때 생각을 정리한 듯한 쟈드가 어른의 모습으로 말했다.

『그래서? 클레어 아가씨는 왜 이런 곳에 혼자 계시는지?』

 정확하게 핵심에 돌진.

『교회의 뒤편을 봤거든. 전염병인 거야?』

 아주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럼 어떻게 물어보면 되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
 클레어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손가락에서 눌러버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본 그대로야.』
『그럼 남은 1명이라는 말?』

 클레어는 곧바로 끄덕이지 않고 가만히 쟈드를 바라보았다. 저것은 꼬마의 모습일 때의 눈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건데?』

 순식간에 필경실 안의 공기가 굳어졌다. 쟈드도 말없이 클레어를 바라보고 있다. 쟈드는 나와 같은 나이이고, 클레어는 나보다 연하이거나 동갑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의 침묵은 지나치게 어른스럽다.

『너는 뭘 원하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쟈드였다.

『뭔가를 부탁하고자 하는 얼굴이잖아.』
『….』
『게다가 돈을 요구했고,』

 현실적인 이야기에 비로소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나와 쟈드는 저 클레어가 분장했던 꼬마 아이가 수도원에서 도망치고 싶어 해 여비를 구하고 있다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클레어를 보면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닐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리들을 필사적으로 이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한 것은 수도원의 이 상황을 숨기고 싶었던 거지? 뭐, 들켜버린다면 난리가 났을 테니까.』
『그걸 그만두길 원해.』

 침대에 앉아있던 클레어는 쟈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하, 협박당하고 있는 거 같네.』

 쟈드가 그 말을 한순간이었다.

『그래.』

 클레어가 말하자 쟈드는 웃는 얼굴로 움직임을 멈췄다. 쟈드가 진심이 담긴 싸움을 한 것은 몇 년 전이 마지막이었지만 그 독특하고 그리운 감각이 되살아난다.

『난 스승에게 확실하게 배웠지. 물건을 원활하게 처리하려면 어느 쪽 입장이 위인지 항상 끝까지 지켜보라, 고 하셨거든.』

 클레어가 꿋꿋하게 턱을 들었지만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어째서 당신들처럼 미천한 자들에게 마실 것을 대접했다고 생각해?』
『어?』

 쟈드가 손에 들고 있던 나무잔을 바라본다.

『환대하는 방법에도 계율이 정해져 있지만 아랫것에게 대접하라, 고는 하지 않아.』
『설마.』

 쟈드의 얼굴이 경직됨과 반대로 클레어의 눈은 점점 차가움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책엔 약에 대해 기록한 것도 있어. 물론 독에 대해서도.』

 나는 황급히 나무잔을 가까운 곳에 내려놓았다. 그 의미는 손에 들고 있기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설사약이야. 내버려 둔다면 아마 말라 죽겠지. 하지만 멈추는 약도 있어.』
『이….』

 쟈드는 나오는 것은 금방 먹어치우는 성격이다. 잔은 비어있다.

『하지만 잠자코 있으면 돼.』
 간청을 해도 들어줄 성녀가 아니다. 계교를 꾸며 억지로라도 자신이 원하려는 것을 취하려 한다. 
 본래 꼬마로 가장하면서까지 수도원의 내부상황을 감추려고 했던 아이였다.

『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야?』

 솔직하게 항복하지는 못하겠는지 쟈드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말투에는 패기가 없었고 나도 엉덩이 주변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다.

『그래. 이곳의 상황이 알려지면 나는 곤란해져.』
『그렇지만, 언제까지 감출 순 없어.』

 그것은 불길한 느낌의 뱃속도 마찬가지다. 무슨 약인지 모르겠지만, 산더미처럼 책을 읽어온 나에게는 짚이는 게 너무 많다. 은방울꽃과 비슷한 독초?[각주:16] 검은 호밀의 독?[각주:17] 그것도 아니라면 안티몬의 광석을 깨트려 만든 분말?[각주:18] 아니, 설사약이 아니라 구토제일 수도?
 나와 쟈드는 이것을 숨기는 걸 원치 않는다.

『감출 수 없다고? 괜찮아. 좀 더 시간이 주어지길 바라는 거야.』

 우리들의 배에도 시간이 없을 것 같다.

『쟈드….』

 이름이 불린 쟈드도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피한 것은 억울하지만 패배를 받아들이는 기색이다.

『숨기는 건, 몇 개월. 아니, 앞으로 한 달.』

 이곳에 한 달에 두 번, 쟈드가 짐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괴짜 이단심문관의 문제도 있지만 그 녀석은 책을 읽고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쟈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알겠어.』

 고통스러운 듯 신음하며 말했다.

『하지만.』


 물어뜯을 것처럼 이빨을 드러냈다.

『이유를 말해. 네가 어느 귀족의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大) 지델 상회의 일원이다. 지델 상회는 귀족의 횡포에 굴복하지 않아!』

 단순히 여자애에게 져선 안 된다는, 도시 아이의 허세이기도 하면서도 그 거대한 조직을 담당하고 있는 자로서의 긍지도 엿보인다.
 그러나 또다시 억지스럽게 밀어붙이는 모습에, 존경의 시선을 돌려버렸다.

『설, 설사약의 해독제는 꺼내지 않을 거야.』

 클레어의 저항을 보자마자 갑자기 쟈드가 나를 바라보더니 저벅저벅 걸어왔다.

『뭐, 뭐야!?』
『이리 와.』

 그리고 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힘을 주었고 클레어를 향해 쓰러졌다.

『꺄악! 뭐, 뭐 하는 거야!』
『말해! 말하지 않으면 너도 똥을 뒤집어쓰게 될 거야!』

 나와 쟈드 사이에 클레어가 끼어 버렸다. 나는 여자아이 앞에서 똥이 샐까 봐 매우 당황했지만 쟈드가 어깨를 단단히 누르고 있어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게다가 클레어가 나와 쟈드 사이에 끼어있지만 날뛰고 있는 탓에 클레어의 머리카락이 얼굴 가까이에 있어서 이전에 맡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냄새가 나는 바람에 현기증이 날뻔했다.

『그만! 아랫놈들! 천민들아!』
『어서 빨리 말해! 빨리 말하지 않으면 똥을 뒤집어쓸 거야!』
『아아! 정말! 거짓말이야!』
『뭐가!』

 쟈드가 따졌다.

『거짓말이야! 설사약은 거짓말이야!』

 파앗, 하고 쟈드가 일어난다.

『속이다니!』

 쟈드가 고함을 쳤지만 클레어도 불타는 듯한 눈으로 쟈드를 노려보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 할 처지야?』

 솔직히 말해 독을 탔다고 거짓말을 한 클레어도 그렇지만, 똥을 뒤집어 씌우겠다며 덮친 쟈드도 심하긴 했다.

『너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나는 그 말에 아직 자신이 클레어의 옆에 누워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깜짝 놀라 일어나자 침대 가장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마치, 취하지도 않았는데 남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야기 속의 멍청한 상인처럼.

『하지만 언질[각주:19]은 받았어. 설마 지델 상회가 한입으로 꺼낸 약속을 쉽게 없는 일로 하는 꼴불견들의 모임은 아니겠지?』
『윽.』

 쟈드가 신음했다. 이 말 저 말 해대며 말싸움을 할 순 있지만, 쟈드의 성격을 본다면 그런 한심한 일을 하진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험악하게 기 싸움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나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저, 저기….』
『뭐야!』『뭐!』

 서로 노려다 보고 있는 이들의 분노가 나를 향했다.
 한심하다는 생각과 함께 결국 책의 세계 밖에서 살아보지 못한, 책을 먹는 좀(紙魚)과 같아 보였다.
 하지만 좀은 좀 나름대로 생각이 있긴 할 것이다.

『사정이 있다면 그걸 우리가 알았을 때 협력해줄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게다가 자세한 사정을 알았을 때 그 상황을 이용해 책을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 수도원에 남아있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클레어, 한 명 뿐이니까.

『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지?』
『….』

 클레어는 쟈드를 노려본 채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쪽의 이야기를 듣더니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항복의 표시로 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는 것과 같다.
 쟈드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이보다 더 격렬한 사태로 이어지는 것은 원치 않은 것 같다.

『다른 짓을 하지 않는 다면 약속은 지킬 거야. 단, 협력 여부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하아.』

 클레어는 쟈드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로의 불빛과 포도주가 필요해….』

 역시 귀족 아가씨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었다.






  1. 중세 유럽의 건축 양식 중 지붕에 있는 괴수 형태의 석상인 “가고일(Gargoyle)”을 묘사한 것이다. [본문으로]
  2. 開祖. 무슨 일을 처음으로 시작(始作)하여 그 일파(一派)의 원조(元祖)가 된 사람. [본문으로]
  3. 당시 수도원은 숙소와 회관, 식당, 학당, 순례자 숙소, 병원, 묘역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4. 서방수도원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누시아의 베네딕트는 모든 수도원에 도서관을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중세의 수도원들은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고 책을 생산하기 위하여 필사 전용실인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 필경실)을 갖추었다. [본문으로]
  5. 중세엔 유리 제조기술이 부족해 양질의 유리는 구하기 힘들었고, 때문에 귀족이나 큰 상회에서나 유리창을 달수 있었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탄생한 이유도 값비싼 유리값을 아끼기 위해 조각난 유리들을 이어 붙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에티켓을 말한다. 프랑스어 estiquer에서 유래한 이 말은 14세기 중세 프랑스 궁중에서 만들어 졌다고 전해진다. [본문으로]
  7. 일반적으로 중세 유럽 귀족들의 이름은 “이름”-“봉작지(封爵地)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영국, 에스파냐권, 이태리에서는 대수와 봉작지 이름을 기재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클레어는 퍼스트 네임, 엘은 미들 네임, 카르디소는 봉작지, 샬리뇨는 가문명이다. [본문으로]
  8. 聖人傳. 그리스도교의 성인이나 순교자의 전기, 사적 등을 기록한 서적을 말한다. [본문으로]
  9. 沒藥. 양배추 과에 달린 좀나무. 잎은 겹잎이고, 꽃은 네잎꽃이며 열매는 핵과.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자람. 몰약의 줄기 속에서 새어 나오는 즙을 말린 반투명의 덩어리는 특이한 향기와 맛이 있는데 방광 자궁 따위의 분비 과다를 억제하고 통경제, 건위제 함수제로 쓴다. [본문으로]
  10. 草稿. 흔히 원고(原稿)라 불리는 것으로 글쓴이가 글을 발전시키기 위해 초를 잡아 적는 예비 단계 또는 그 단계에 있는 글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1. 13세기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했던 이탈리아의 수도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아시시 평원에서 참새를 설교했다는 일화를 말한다. [본문으로]
  12. 고대 로마의 철학자인 루크테리우스가 저술한 “사물의 본성을 위하여.(T.LUCERTI CARI DE RERUM TATURA)”를 패러디 한 것이다. 특히 인문주의자인 니콜로 데 니콜리(Niccolò de' Niccoli)가 직접 필사한 필사본의 마지막에는 “LEGE FELICITER(행복하게 읽을 것)"이라는 당부의 말도 남겨져 있는데 이를 차용한 것이다. [본문으로]
  13. 실제 중세 수도원의 건립 목적이기도 했다. 중세 초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죄를 지을 만한 환경을 만나면 죄를 짓게 되는 육신의 연약함을 알고, 세상과 격리된 곳에서 죄의 유혹을 피하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기독교인들의 신학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14. 다양한 신들이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기를 말한다. 그 유명한 판테온(Pantheon)은 로마의 만신(萬神), 그러니까 만 명에 달하는 로마 전통 신들을 모셔놓은 신전이었다. [본문으로]
  15. 15세기 중반 활자로 인한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활발히 이루어 졌던 책 제본 방식인 필사는 작업기간이 최소 몇 개월에서 최대 몇 년간 이루어지는 힘든 작업이었다. 심지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참회의 방법으로 여겼으며, 필사를 얼마나 했는가에 따라 천국에 갈수 있는지를 계산한 기록도 남아있다. [본문으로]
  16. 은방울꽃(Muguet)은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꽃이다. [본문으로]
  17. 맥각(麥角)을 말한다. 클라비켑스라는 균에 감염된 보리나 호밀의 알맹이는 검게 변하는데 이를 먹게 되면 발작, 구토, 두통, 환각등이 일어나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된다. [본문으로]
  18. 안티몬은 원자번호 51번인 준금속인 안티모니(Antimony)를 말한다. 중세에는 안티몬을 이용해 Everlasting pill이라는 강력한 설사약을 제조해 사용했다. [본문으로]
  19. 言質. 상대방이 한 말을, 뒤에 자기가 한 말의 증거로 삼음. (순화어로 언질을 주다 -> 귀띔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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