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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제1막

(◉◞⊖◟◉) 2017. 5. 29. 16:26


을 뜨자 짐마차가 흔들리고 있다. 
 한겨울의 고비를 넘어가는 날이자 내뱉는 숨이 아직도 흰 시기였지만, 날씨가 맑고 바람도 없어서 석조 건물 안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낫다.
 깃털이 한 장씩 얼굴 위로 내려오는 듯한 햇살 아래에서 한가로이 누워 있으면 천천히 움직이는 짐마차가 내는 단조로운 소리와 진동 탓에 금방 졸음이 몰려온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
 나는 두 뺨을 손으로 친 후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뚜둑, 다닥, 같은 소리가 난다. 오른쪽 어깨에 납을 씌워놓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밤새도록 모기 눈알을 채집하는 것과 같이 세밀한 작업을 했던 탓이다.

『태평한 모습이야.』

 마지막으로 큰 하품을 하고 있자, 마부석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마차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업무를 할 때 쓰는 도구로, 짐받이에 가득 짐을 싣고 나르는 것도 이 녀석의 일이었다.
 나는 거기에 올라탄 몸이었지만 이것도 엄연한 상회의 명령을 받아 일을 수행 중인 것이다.
 그리고 태평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 해야 할 업무에 대한 내용을 듣고 열의를 갖는 바람에 어젯밤에 잠들지 못했고 결국 새벽까지 일해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낮잠을 잔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꿈속에서도 앞으로 향하는 협상 장소에서 해야 할 몸가짐을 다시 한번 그리면서 점검하고 있었으니까.

『교황청에서 퇴근하는 것 마냥, 짐칸에서 폼 잡으면 되니까 즐거운가 봐.』

 그건 나를 처음부터 얕잡아보고 있다는 것으로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칙칙한 금발에 빤질 한 이마가 드러날 정도로 짧게 깎은 녀석인 쟈드는 비아냥거리고 있다. 쟈드는 나와 마찬가지로 지델 상회라는 큰 상회에 고용되어 있다. 젊은 녀석이라고 하기엔 노안인 쟈드는 나이는 14살로 나와 동갑이며 키가 제법 커서 얼핏 본다면 어엿한 어른으로 보인다. 이 나이에 고된 짐마차를 맡은 것도 타고난 체격 덕분이다. 반면 나는 슬프게도 사람들이 내 나이에 맞게 혹은 그보다 어리게 본다.
 여름이나 겨울,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에도 막노동을 하는 쟈드와 달리 이쪽은 오로지 실내에서 글을 상대하는 일을 한다. 등이 굽고 피부가 창백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동경하는 영웅처럼 칼을 휘둘렀다면 팔뚝이 굵어졌겠지만, 영웅담만 읽었을 뿐 영웅답게 되진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어깨와 허리는 항상 아프고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혔으며 눈은 나빠져, 건강한 것은 입뿐이었다.

『시끄러. 어제 밤에… 아니 오늘 아침까지 양피지를 다듬고 있었다고.』

 밤을 새우며 일하는 것은 누구보다 많이 하고 있다는 증거. 나는 가슴을 펴며 대답을 한 후 덧붙였다.

『쟈드, 말이나 잘 몰아. 계곡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해야지, 안 그러면 14만 권이 담겨있는 내 머리도 함께 사라지는 거니까. 잃어버린다면 상회에도 큰 손해거든.』
『으하하. 헛소리하고 있네. 계산대에서 매출이 나쁜 상인을 어떻게 혼내는지 알려줄까? 상품은 모아 놓기만 한다고 이익을 낼 수 없는 거라네.』
『뭐?』
『네가 새벽까지 일하는 건 단순히 너의 솜씨가 나쁜 것 뿐이야. 일 잘하는 녀석들은 그거보다 빨리 끝낼걸.』
『윽.』
『그리고 일이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흥분해서 잠을 못 잤다는 결말인 게 뻔한데. 너는 예전부터 대담하지 못했잖아.』

 쟈드가 껄껄 웃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결국 반론하지 못했다.
 사실, 그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할 거야. 그 점에선 경의를 표하마.』

 일부러 그러는 듯 어른스런 말투를 하다 부스럭거리며 옆에 둔 자루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뒤에 있던 나에게 던졌다.

『글자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져.』

 쟈드가 말과 동시에 던진 고기를 받아, 소금의 짠맛이 느껴지는 그것을 빨며 나는 말했다.

『숫자랑 똑같은 거야. 숫자는 읽을 줄 알면서 글자는 무리라는 걸 이해할 수가 없네.』
『숫자는 금화나 은화를 쌓으면 알 수 있어. 3은 금화 3개, 8은 은화 8개라고 상상할 수 있지만, 글자라는 것은 상상이 되질 않아. 하물며 그것을 줄줄이 늘어놓은 책은 힘들어. 병아리를 가득 담은 상자를 주며 병아리를 정렬하라는 말을 하는 것 같거든.』

 쟈드의 예시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힘든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알 수 있다. 문자는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드문 존재다.
 그 즐거움을 누구에게나 나누고자 한 바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필.』

 쟈드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왜』
『나도 가끔은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이 들어.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네가 부럽다는 말이야.』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천하의 쟈드가?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곳에서 동향 사람을 만난 느낌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일까.

『무,무,무,무슨 책을? 내, 내가 읽어 본 적 있는 놈이라면 설명해줄 수 있어!』

 책의 재미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을 것이라고는 희망도 가지지 않았었다.

『제목은 알고 있어? 저자는? 아, 아니, 대충 줄거리만 이야기해줘!』
『아, 응, 그래.』

 쟈드는 지친 듯, 말을 하더니 씩 웃었다.

『책엔 그…. 즐거움이 가득 쓰여 있는 것도 있겠지?』

 어깨 너머로 보이는 쟈드의 얼굴엔 실없는 미소가 보였다.
 어안이 벙벙한 내 머릿속에서 영혼이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있을 거야. 열정적인 성녀가 처리하기 힘든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쟈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것은 최근 나돌고 있는 책으로 유명한 성녀가 부유한 귀족의 후원을 받아냈다는 이야기다. 보통 그런 이야기는 관련 있는 교회나 수도원에 보관되어, 모두에게 잊힌 채 수십 년 동안 서고에 방치되는데, 그 중 한권이 엉뚱하게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아마 내용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본질과는 관계없는 부분에서. 특히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은 떠도는 소문을 자신들의 지식에 맞춰 멋대로 상상하고 부풀린다. 나는 쟈드에게 기대를 한 것을 후회했다.

『뭐라는 거야. 잘 들어, 말 엉덩이 같은 녀석아. 그 책은 어떻게 우리의 육신을 신께 바칠까, 고뇌하던 성인의 고통이 담겨있는 거라고. 신과의 대화를 진지하게 모색한, 심오한 신학적 논의와 사람들의 원죄를 다룬 것이지 결코 비속한 흥미를 느끼고 읽는 책이 아―.』

 라며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아아, 주여, 주여! 욕망으로 가득 찬 제 목소리를 들으소서! 그리고 저에게 벌을 내리소서! 이 몸은, 아아, 주여! 저는 이제 참을 수가 없어욧!』

 쟈드가 목소리를 가늘게 한 후, 몸을 배배 꼬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유명해진 원인이었던 구절을 읽은 것이었다.

『저의 욕망으로 가득 찬 몸에 당신의 이름을 깊이, 깊이 새겨주세욧, 바로 이 몸엣…!! 라고 들었다고.[각주:1] 게다가 그 성녀님은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芳香)를 풍기는 꽃 같은 여성이 었다면서. 이봐, 필. 너도 당연히 읽었겠지? 역시 성녀님은 미인이었을까? 이봐, 이봐, 어떻게 생각해?』
『….』

 머릿속엔 외설적인 책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 거칠고 험악한 선배 상인들과 함께한 술판에서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성녀의 달콤한 향기를 정열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단식을 거듭한 성인들은, 천사의 축복 때문인지 몸에 달콤한 향기를 풍길 수 있다고 들었다.
 즉, 그 성녀는 쟈드가 좋아할 만한 풍만하고 아리따운 몸매가 아니라, 눈이 쑥 들어가고 입술은 말라 있으며, 뼈와 가죽만 남은 엄숙한 신의 종(從)과 같은 모습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 바보에게 어떻게 성자와 성녀들의 위대함을 잘 알려줘야 할지 쩔쩔매고 있자 쟈드가 끈질기게 물어온다.


『읽어 봤어? 공방에는 귀족들이 빌린 책들이 오잖아?』

 나는 작은 목소리로, 사실만을 이야기 했다.

『…. 읽었어.』
『어땠어, 어땠어!? 역시 알려진 대로야!?』

 쟈드는 떠돌이 개와 같은 모습을 한 채, 마부석에서 짐칸으로 뛰어넘어오진 않았지만 몸을 내밀었다.
 나는 몸을 당기면서 눈을 돌렸다.

『읽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내용은 그…. 성녀가 달콤한 향기를 날리는 건, 금식을 하는 성인들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상투적인 표….』

 얄팍한 지식으로 이상한 망상만 키우고 있다. 쟈드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 책 속엔 오로지 신과 하나 됨을 목표로 한, 정말 고통스러울 정도의 절박함을 가진 성녀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신에 대한 헌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마치 영원의 사랑을 말하는 것 같은 관능의 울림까지 느껴지는…. 성녀…. 무척 아름다운 성녀…. 아름다운….

『어이 필!』
『헉! 뭐야!』

 무의식중에 얼굴이 붉어 졌다.

『얼굴이 빨개졌는데.』
『윽. 닥쳐! 떠돌이 개 같은 놈아!』

 내가 화를 내자 쟈드는 껄껄 웃었다.

『뭐, 나는 책 속의 여자보다 현실의 여자 쪽이 좋은 거 같아.』
『넌 고민이 없는 거 같아 부럽다.』
『고민은 원래 있는 게 아니라, 찾아내는 거야.』
『그거…. 성(聖) 뮤리아네스, 였나?』
『내가 생각해낸 건데.』

 방랑 학생이 있는 것 같은 마을의 술집에서 지식을 과시하는 학생을 바보로 만들기 위한 상투스러운 문구.
 말려든 내가 밉다.

『그나저나 필 씨.』

 갑자기 씨를 붙여 말한다. 또다시 어떤 것으로 나를 바보 취급할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쟈드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꿈은 아직 먼 거 같지 않아?』

 말의 엉덩이를 채찍질 하며 물어왔다. 불쾌감이나 장난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고, 단순히 여행 계획을 확인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나는 그것에서 쟈드와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것도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철 들었을 때부터 같은 상회에서 일하고 있는 나와 쟈드는 같은 날 상사의 처마 밑에 버려졌다고 하니, 사실상 친형제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두 사람이 함께 했다는 것은 오래전 이야기다. 최근 몇 년 동안 나와 쟈드의 상회에서 꿈꾸는 바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그야말로 상대가 어디로 가는지, 거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정도로.
 쟈드는 뛰어난 체격을 살려서 상사의 판로를 확대하는 행상인을 목표로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다.
 한편 나는 엄청난 꿈을 꾸고 있다.

『꿈은…. 그렇지, 태양과 같아.』

 하늘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쟈드가 마부석에서 얼굴을 이쪽으로 돌렸다.

『매일 아침 지평선 너머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항상 먼 곳에 머물지. 게다가 눈부셔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 손을 뻗으려 하면 서쪽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실의에 빠져버리게 되. 하지만 다음날 다시 땅의 동쪽에서 얼굴을 내밀어. 정말 심하지. 아예 떠오르지 않은 다면 포기할 텐데….』

 감정에 빠져 말했더니 쟈드는 코끝을 긁으며 몸을 내밀어 왔다.

『시시해.』
『뭐, 뭐가!』

 대들었지만 쟈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아직 멀었다는 거잖아. 점잔빼지 말라고. 오줌싸개 필.』
『아, 그, 그건 이제 옛날이야기잖아!』
『뭐, 한동안 오줌싸개라고 불렸잖아? 화물에는 싸지 마라. 혼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쟈드는 내 머리를 톡하고 치더니 크게 하품했다. 두 번 연속 공격에 당한 나는 뿌루퉁한 얼굴을 하고 다시 짐 위에 누웠다. 큰 꿈을 쫓아갈 용기도 없는 주제에, 라며 가슴 속으로 쟈드를 욕했지만 그것은 억지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태양 앞을 한 마리의 솔개가 유유히 지나간다. 솔개는 태양을 품고 날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힘껏 손을 뻗으니 태양은 커녕 솔개의 발끝에도 닿지 않았다. 나는 땅바닥에서 꿈을 꾸고 있을 뿐이었다.
 태양을 향해 꽉 쥔 주먹을 쾅 하고 내려쳤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는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상회의 사람 중엔 혀를 쯧쯧차며, 나를 미치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나는 꼬질꼬질하게 옆으로 누운 채 몸을 돌돌 말았다.

『단순히 읽지 못한, 미지의 책을 찾고 싶은 것 뿐인데….』
『추잡한 책이 아니고?』
『다르다고 했잖아!』

 나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몸을 일으킬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곳엔 있지만 잡을 수 없는 태양을 바라 보았다.
 내 꿈은 그저 책을 보고 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 있는 이교도가 지금도 침공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책 같은 걸 옆에 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스승을 바꾸면 되잖아.』

 갑자기 쟈드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스승을 계산대를 담당하고 있는 피치노씨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글을 읽고 쓸 줄 아니까, 계산대에서 일하는 동안은 편할 거라고 생각해. 장래에는 지델님의 서기로서 풍부한 책들과 함께하면 되는 거고.』

 쟈드가 무미건조한,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말을 했다.

『나는 책의 세계에서 살고 싶어.』

 그것은 장인의 삶은 아니다. 책이라는 것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장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책과 연관된 일이라면 단순하고 가기 편한 길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좁은 길을 걷고 싶다.

『서적상, 말이야.』

 자신도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안개를 파는 일이야.』

 안개는 분명 그곳에 있지만, 결코 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상인은 팔 수 없다. 일확천금을 좇아 헤매는 듯한 젊은 상인에게 충고할 때 쓰는 관용구인 것이다.

『대게 책은 그렇지 않아? 호사가끼리 서로의 책을 복사해 내잖아? 그래서 어떻게 장사를 할 거야? 파는 것이 일인 상인인데 팔 방법이 없어.』
『알고 있어.』

 원격지 무역 상선을 여러 척 보유한 지델 상회조차 책을 매매한 마지막 기록이 22년 전이다. 간간히 호사가들끼리 융통하는 물량이 있긴 하나, 그것은 상인이 얽히는 장사와는 거리가 멀다. 간단한 거래나 통째로 빌려주는 것뿐 아니라 교환하는 것조차 줄어들고 있다. 이렇듯 책이라는 것은 쟈드가 말한 대로 사본을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기에 적극적으로 거래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아. 불가능을 가능케 한 사람은 많이 있었으니까….』
『신도 두려워하지 않은 대담함이네. 길을 고칠 거라면 빠른 편이 좋을 거야.』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말고삐로 말의 엉덩이를 찰싹하고 때리며 쟈드가 말했다.

『근데, 너에게 금 세공사는 할만하냐. 붓쵸[각주:2] 대장이 너를 자주 부렸잖아.』
『금 세공을 하는게 아니라 책 제본을 하는 거고, 그건 서적상이 되기 위한 발판에 불과하거든!』[각주:3]

 라고 패기를 담아 소리쳤으나, 실은 자신을 타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리 내가 서적상이 되고 싶다고 아우성쳐도 할 수 없는 장사를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상회는 자애로 가득 찬 수도원이 아니므로, 제 몫을 하지 못하는 놈을 먹일 만큼 관대하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는 서적의 수리와 장식을 맡고 상회의 어용 장인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의 일은 다양하다. 일그러진 가죽 표지를 두드려 수리하거나, 벗겨진 부분에 금박을 입히고, 혹은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식을 수리하기도 한다. 그 외에는 해이해진 페이지를 묶어주는 끈을 조이기도 하고, 썩은 페이지를 새 양피지로 교환하거나, 소유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의 문장을 깎고 나서 다시 쓰기도 한다. 즉, 책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고 있다.[각주:4]
 훗날 서적상이 되었을 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간단하고 단조로운 작업도 괴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장정 장인조차도 앞길은 막막했다. 지델 상회가 전 세계에 상업망을 설치, 수많은 귀족들을 고객을 가지고 있었는데[각주:5] 그중에서도 책을 즐기는 듯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호사가가 책의 수리나 장식을 의뢰하는 경우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지델 상회의 유일한 장정 장인인 붓쵸 대장이 은퇴하면 상회에서는 그 일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의 허드렛일을 한다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해 관을 따듯하게 만들어 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구로부터 고마움의 인사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죽은 이와 함께 매장되어 버린다. 서서히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과 다름없다는 뜻이다.

『순순히 서기를 목표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괜찮아. 붓쵸 대장이 젊은 시절엔 책의 매매를 전문화하는 상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었거든. 반드시 서적상이 필요한 세상이 올 거야. 그러기 위해선 책과 가깝게 할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인 거지.』
『흐음? 뭐, 이교도와의 전쟁이 끝나면 그런 시대가 올지도 모르지.』

 한여름에 눈이 내린다면 시원해지기는 한데, 라는 어조로 쟈드가 말했다.
 교황이 지시하고, 교회가 지지하는 이교도와의 대규모 전쟁[각주:6]은 불과 몇 년 전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역사책을 읽으면 전란의 바람은 30년 전부터 대륙을 휘몰아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대가 하나 바뀔 정도로 오랫동안 진행된 전쟁은, 우리들의 눈을 가려버렸다.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고 그것이 지속되면서 전쟁을 그만두더라도 누구에게 전쟁을 그만두자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대의도, 목적도, 원망할 대상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살육을 거듭하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악마와 같은 지혜로 활로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공통의 적을 만들어 주어, 폭력의 흐름을 한곳으로 몰리게 한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신앙의 총본산에 있는 교황이며, 섬멸해야 할 대상인 이교도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피로 얼룩진 역사는 세계를 타락시켜버렸다. 과거에 큰 인기를 끌었던 우아한 노래와 춤은 광대와 폭력에 의해 변해버렸다. 그런 상황에 서적에 큰돈을 쓰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없다. 그럴 돈이 있다면 무기를 갖추고, 식량을 비축하며, 술을 마시며 세상의 시름에서 눈을 피해 일심불란(一心不亂) 하게 싸워야 한다.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전쟁이 없는 상황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 것은 역사책 속에서나 볼 수 있지만, 역사책은 좀처럼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귀족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글자를 익혔고, 흉내를 낸 것뿐이었지만 시를 짓고, 우주에 대해 논의한 시대가 분명히 존재했다.[각주:7]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롭게 되면, 다시 많은 사람이 책을 읽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귀족끼리의 사사로운 거래가 아니라 책의 매매가 이루어지고 책으로 인해 도시가 세워지며, 서적상의 등엔 책이 산더미만큼 쌓여 문화와 오락의 주역으로서 존경받던, 그런 시대 말이다.

『어쨌건, 붓쵸 대장은 좋은 사람이야.』

 쟈드의 목소리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너처럼 귀찮은 녀석을 냉큼 내치지도 않으니까 말야.』

 쟈드는 말의 엉덩이를 찰싹하고 때린다. 자신의 엉덩이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내가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만, 절망적일 정도로 일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나는 서적상이 되기 위한 발판을 위해 상회에서 쫓겨나지 말라는 장정 장인인 붓쵸 대장 아래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만, 도움이 되는 지는 나 자신도 의문스럽다.
 아마 일반적인 장인의 제자였다면 벌써 공방에서 쫓겨나고, 불쌍히 여긴 누군가가 다른 일을 권유했을지도 모른다.

『예전, 붓쵸 대장 밑으로 들어갔을 때, 말 그대로 팔에 달라붙어 간절히 부탁했었잖아.』
『꿈을 위해선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야.』

 기 죽은 채 대답했다.

『달라붙은 게 아니라 물어뜯었잖아? 어떤 일이든 당하는 쪽이 반드시 문제가 있는 게 아닌데 말이지.』

 쟈드가 거침없이 말을 하는 건 오래 전 부터다.

『오늘 아침 갑자기 납품 할 게 있다며, 너를 데리고 가라고 했을 때 놀랬지만 생각해보면 그 의도를 대충 알아챘거든.』
『무슨 말이야.』
『서적상이 되고 싶어서, 라는 황당한 이유로 다가온 놈을 제자로 삼긴 하셨지만, 그놈은 서적상은 무리인 데다 일 처리는 절망적일 정도로 서투르지. 이대로 계속 간다고 해도 한계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른 일을 시켜서 그 길로 가길 바라는 마음 말이야. 붓쵸 대장은 좋은 사람이야.』

 쟈드는 마음대로 말을 지어냈지만 반론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희미하게나마 그런 걸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가 어떤 일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나이가 들기 전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 거잖아. 그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넌 행운아다!』
『우….』

 그렇다. 상회는 천사들이 모이는 수도원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일하고 기여하게 되어있다. 그런 곳에서 제 몫을 해내지 못하는 녀석을 걱정해주는 이유는 말해준 적이 없다. 붓쵸 대장이 나를 제자로 받아준 것은 가뜩이나 적은 일 속에서 간단한 일이라도 배우라는 동정에서, 라고 알고 있다. 붓쵸 대장 자신도 세계가 책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음에도, 고집을 부려가며 일을 계속해온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래서 더욱 나에게 찾아온 이 호기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서적상이 될 거야.』

 교회에서 신에게 기도할 때보다 더욱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 진지함 때문인지, 쟈드도 더는 비웃지 않았다.
 그리고 곧 마차가 멈췄다.

『도착했어.』

 전방에는 우뚝 솟은 돌로 세워진 벽이 있다.
 그랜든 수도원.
 내가 붓쵸 대장으로부터 장서 매입을 지시받은 수도원이었다.



 


 그랜든 수도원은 절벽에 세워진 요새 같은 곳이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야만족이 쳐들어오더라도 즉각 되 쫒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두껍고 높은 석벽은 “신앙의 보루”라는 별명에 맞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가도(街道)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서 주위에 인가(人家)는 보이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도 걸어서 한나절이 걸리며 지델 상회에서는 하루 이상 걸리는 거리에 있다. 괴팍한 양치기가 아닌 이상 오지 않을 장소이며, 가도에서도 벗어 나 있기 때문에 나그네가 찾아올 일도 없을 것이다.[각주:8]
 안개를 사들일 장소로는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비한 장소였다.

『내부도 넓을까?』

 나는 위압감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입을 열었다.

『상당히 커. 30명이 생활하고 있는 데다 밭도 있고 제분소와 착유 장치의 부품을 납입한 기록도 있거든. 상당히 부유한 귀족이 후원하고 있겠지.』
『그런 곳인데 돈에 쪼들리고 있다는 게 정말일까?』
『내 추측이 이상해?』
『아니….』

 원래 이 수도원에 있는 장서의 매입을 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쟈드의 건의가 발단이었다. 월 2회, 이 수도원에 물건을 납품하는 쟈드가 이 수도원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 후 쟈드가 상대방이 돈 때문에 곤란해 하는 것을 기회로 삼는 것이 상인이라며 상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회의 높으신 분들은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그랜든 수도원이 돈에 쪼들리고 있다면, 거기에 있다고 알려진 훌륭한 장서들을 사들이자는 것. 그리고 도서를 구매한다면 서적상 견습에 도움 될 것이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나는 물론 굉장한 흥분감에 휩싸였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대량의 책을 매입한다고 해도 팔 상대가 없다. 아마 매입한 후엔 지델님의 서가로 보내질지도 모른다.
 자드가 말했듯이 이것은 붓쵸 대장의 배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연극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짓누른다.
 하지만 인생 최대의 기회라고 하면 기회일 것이다.
 서적상이라는 꿈.
 흉내만이라도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의심하는 건 이해하는데 수도원에 우릴 맞이하는 꼬마를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한건지 이해할 거야.』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쟈드는 어느새 나 이상으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의 판단에 자신감을 가진 상인의 모습. 그런 쟈드의 모습에 우울해지며 부끄러웠다.
 쟈드는 중후한 문을 힘껏 두드렸다.

『지델 상회에서 왔습니다! 신의 대리인들과의 계약에 따라, 오늘도 약간의 성의를 바치러 왔습니다!』

 쟈드가 가지고 온 것은 사실 수도원이 사들인 물건이 아니다. 약 3년 전에 이 수도원에 기부한 대귀족과의 계약에 근거해 납품되고 있는 것이다.
 원래 그것은 신의 중재를 부탁하는 중요한 의식의 일환[각주:9]인데, 몇 년간 한 달에 두 번씩 이어지면 의례적인 교환도 소홀해진다.
 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쟈드로 부터 들은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두 달 전 응대를 나온 수도원의 아이로부터 이런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납입품의 수를 줄일 순 없냐고. 그런 이상한 청원을 했는데, 최근 들어선 더 기묘한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가능하면, 그것을 현금으로 줄 순 없냐고.
 짐마차 쪽에 서서 일의 진행을 보던 나는 새어 나오던 하품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긴장하면 하품이 나오는 이 버릇은 어떻게든 하고 싶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의 빗장이 벗겨지는 듯 큰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살짝 열렸다.

『안녕하세요, 지델 상회입니다.』

 쟈드는 문밖에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응대에 나온 수도원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 것도 문 앞에 놓아두면 될까요?』

 뭐? 라고 생각한 후 짐마차의 짐칸을 보자, 거기에는 엄청난 양의 짐이 실려있다. 게다가 수도원의 짐은 군대도 순조롭게 빠져나갈 정도로 크기 때문에, 곧장 안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속세의 더러운 존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고 싶지 않다는 걸지도 모른다.

『아뇨. 평소대로 입니다. 계약이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쟈드의 말을 들으니 납입물품을 줄여달라는 말을 한 건 사실인듯하다.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세요. 모두가 감사하며, 그랜든 수도원의 이름을 높이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것이 상사의 방식이다.
 쟈드는 문득 나에게 눈짓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그렇지. 실은 상회의 사람이 당신에게 꼭 한번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차례가 왔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전 짐을 내리고 있겠습니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청난 규모의 그랜든 수도원. 나는 이 문을 빠져나가 서고에까지 도달해, 귀중한 책을 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지식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그 공로를 앞세워 서적상으로 장사를 시작해 신이 우리 머릿속에 숨겨놓은 비밀을 파헤쳐 나갈 것이다.
 우선 이 문에 있는 사람이 호의를 베풀지 않으면 모든 이야기가 쓸모없게 된다. 예의를 갖추고 옷깃을 바로 한 후 상냥하게 인사를 하려고 문 안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던 것은.

『무슨 용건이십니까.』

 기름기를 머금은 밤색 앞머리 틈으로 노려 보는 거친 눈이었다.
 키는 나보다 살짝 크고 쟈드보다는 작지만, 몸매가 호리호리해 연상인지 연하인지 알 수가 없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낡은 삼베 수도복으로 후드를 깊게 푹 눌러 쓰고 있으며, 마구간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지 꾀죄죄한 천이 입가를 뒤덮고 있다. 신발은 신지 않았고, 손톱은 새카맸으며, 손가락은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너덜너덜해있었다.
 나는 주춤했다.
 이처럼 훌륭한 수도원에는 가끔 이름 있는 성직자들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마중을 이런 부랑아 같은 꼬맹이가 담당한다고? 아니, 수도원에서는 복장을 신경 쓰지 않으며, 이는 그만큼 엄격한 곳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처럼 큰 수도원에서는 진실한 신앙을 추구하는 만큼 수도자뿐만 아니라 진흙투성이인 지원을 담당하는 보조 수사라 불리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아이는 전형적인 보조 수사중에서도 말단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쳐도 이 거친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달마다 2번씩, 어김없이 대량의 식량이 전달되기 때문에, 굳이 일할 필요가 없는 수도원인데 이 아이는 먹는 둥 마는 둥한 거리의 빈민굴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 세상에 구원은 없다, 라는 분노와 절망이 가득 찬 눈은 수도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 그, 그게….』

 상회에는 곳곳에 상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협상 방법은 배울 수 있다. 일단 돌처럼 달라붙어서 끈기 있게 늘어지겠다고 별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아이의 모습이 나의 의지를 뛰어넘는 모습이었기에 미리 준비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더듬자 문득 그 눈에서 감정 같은 것이 보였다.

『…. 납입품을 현금으로?』

 천 너머에 들려왔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쉰 것처럼 들렸고,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아서인지 여자아이처럼 톤이 높은 것 같았다. 키에 비해 꽤 어린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 이야기를 한순간, 그 두 눈에 잠깐이었지만 희망의 빛이 켜졌다. 나는 상회에 몸을 두고 있으므로 이런 아이들의 불행을 잘 알고 있다.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 순간 눈에서 빛이 사라진다. 그들의 관심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는 없는 것이다.
 서둘러서 준비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그, 물품을 바꾸는 것은 원장님의 결단이 없으면 할 수가 없으니까요.』

 짐을 전달하는 하녀나 하인이, 상품이나 돈을 착복하고 횡령하는 것은 자주 벌어진다고 한다. 쟈드가 상부에 보고를 했을 때도 그 가능성을 우려했었다.
 그래서 붓쵸 대장이나 상회의 높으신 분이 나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아마 수도원이 돈에 쪼들리고 있는 것이 아닌, 착복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진상을 알아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장님은 너 따위와는 만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의 대답은 사전에 듣던 대로 완강했다.

『그럼 앞으로도 특권 증서에 따라 납품이 됩니다.』

 쟈드나 상회의 다른 사람이 반복해서 했던 말.
 아이는 시선을 떨구며 낙담할 기력도 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평소대로라면 역서 끝났을 것이지만 나는 서적상의 제자 필이다.

『다만, 하나의 제안을.』
『?』

 아이의 지친듯한 눈이 나를 향했다.

『장서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응?』

 의아한 눈을 보이자 나는 미소를 띠었다. 이 웃는 얼굴은 의식하지 않고 생긴 것이다.
 아직 아무도 읽지 못한 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마음대로 풀리고 만다.

『이 수도원에는 훌륭한 장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 중 한 권이라도 아니, 목록의 한 페이지라도 볼 수 있다면 저희 상회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
『그런 건 없다.』

 아이는 내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말했다. 책은 장정을 거쳐 보석으로 장식하는 경우가 많아 한 권의 가격이 비싼 경우가 많다. 그리고 수도원은 비밀주의가 강하다. 말단의 아이라도 수도원에 보물이 있다고 외부인에게 말해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의 대답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가치를 모른 채 보관하고 계실 수도 있으니, 제가 사서인 분과 한번 이야기를 해보―.』

 라고 말한 순간이었다.

『사서 같은 건 없어!』

 아이는 외침과 동시에 나를 밀어 넘어트렸다.

『돌아가!』

 그리고 문이 닫히며 걸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밀쳐진 가슴을 감싸 쥔 채 어리둥절했다.
 뭔가 난처한 말을 한 걸까,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어 봤다. 하지만 짚이는 바가 없다.
 무엇보다 이것으로 끝난 거야? 라는 것이 가장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꿈이 깨진다고?
 분해서 영문도 모른 채 쩔쩔매고 있자 ‘툭‘ 하며 어깨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쟈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수했으니까, 밤에 술을 사는 거다.』[각주:10]
『어? 아니, 이유를 모르겠다고!』

 내가 그렇게 대꾸하자, 쟈드는 어깨를 크게 으쓱했다.

『네 말투가 무례하거나, 얼굴이 무례하거나 한 거겠지.』
『난 네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몰랐어.』

 자드는 자신의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 이 수도원은 돈이 궁한 게 아니었나. 그 녀석은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어서 돈을 탐낸 거라는, 시시한 결말인가봐.』

 쟈드는 소리를 죽이더니 귀에다 대고 나지막히 말했다.

『내부의 인간이 우리와 만나게 되면, 착복한 것이 들통나니까. 네가 사서와 이야기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 녀석의 눈 봤지? 그 눈은 겁에 질린 눈이었어.』
『….』

 수도원이 돈으로 곤란해 하는 게 아니라면 서적의 존재를 밝히는 것은 무리다. 안개는 불어온 바람을 타고 문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나는 다시 수도원을 바라보았다.

『신경 쓰지 마. 내 추측이 잘못된 탓도 있으니까. 아―아, 꽤 큰 돈벌이 기회는 많지 않은데 말이야.』

 쟈드는 그렇게 말하곤 마차 쪽으로 걸어가 흥, 흥 거리며 짐을 입구에 적재해 쌓아 올리는 작업을 담담하게 해내고 있었다.
 쟈드가 말하는 대로 일발 역전의 기회는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문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연극은 이렇게 어이없이 끝난 거야? 이제 꿈을 포기해야 하는 거야?

『자, 볼일 다 봤으면 돌아가자.』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쟈드가 짐을 다 내려둔 것이 보였다.
 나는 문을 다시 두드려 끈질기게 부탁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욱 험악한 얼굴로 거절당할 테고, 그렇게 되면 불필요하게 까다로워질 것이 눈에 보였다.
 우선 수도원 측에서 돈 문제로 곤란함을 겪는 게 아니라면, 자신이 매달린다는 이야기에 수도원의 고위 수도사가 지델 상회에 불만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상회에게 폐를 끼치는 일 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
 버려진 아이를 키워준 은혜뿐만 아니라 내가 서적상이 되고 싶다는 헛소리 때문에 힘들었을 붓쵸 대장에게도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쟈드는 그렇게 말하며 마부석으로 뛰어 올라타 고삐를 쥐었다.

『안 오면 놔두고 가버릴 거야.』

 말을 향해 가면서 나는 작은 신음을 내며 짐마차를 바라본 후, 문을 보았다.
 그 중후한 석조 건물의 위엄은, 바로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 그 자체였다.
 하지만 자그마한 틈새로 기적의 빛이 살짝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 꼬마의 두려움에서 사서의 존재가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애초에 사서라는 단어를 이해할 아이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문지기였던 꼬마는 돈이 필요한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틈새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여비를 손에 넣어 수도원을 벗어나기 위해 계획 중인 것 같았다. 이건 절망스러워하는 꼬마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꿈과 책에 대한 열정.
 그것은 결코 끄지 못하는 지옥 불처럼, 내 몸을 불태우고 있다.





 하룻밤 노숙을 한 이후 새벽에 지델 상회의 본거지가 있는 항구도시 류스티아로 돌아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시벽 앞엔 이미 거대한 행렬이 있었다. 무언가를 팔러 온 먼 상인, 인근 지역의 농민, 순례자, 성직자, 편력 장인들 등. 시장이 열리는 신호인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각주:11] 시벽을 통과할 수 없지만 쟈드가 모는 마차는 터벅터벅 대기열의 옆을 지나간 후 지델 상회의 특권증서를 보여주자 통과할 수 있었다.
 쟈드는 항상 이렇게 통과하기 때문에 별다른 내색조차 없었지만, 나는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벅찼다.
 시벽을 통과하자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며 사람과 물건을 넘쳐나고 있었다.
 한 척이 입항하면 하역하는 데만 2주가 걸린다는 원격지 무역[각주:12] 선박들이 매일 입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구에는 하역하는 남자들, 짐을 세는 관리와 상인들에게 짐을 나르는 짐마차로 붐비고 있다. 짐을 지키는 도제들이 핏발 선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이유는 도둑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두려워 하는 것은 제품을 한시라도 빨리 사고 싶어서 포장된 짐을 건드리는 상인들이다.
 그 밖에도 입항한 선박을 수리하는 장인과 앞으로 출항하는 배의 상태를 점검하는 장인들이 둘러앉아 아침 회의를 하고 있으며, 그 주위로는 수리와 점검을 위한 장비를 공급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고용주에게 총애를 받기 위해 계약 성사를 두고 다른 회사 동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빵과 고기를 판매하는 상인들이 그들에게서 떡고물이라도 얻으려는 떠돌이 개들과 돼지, 닭들과 함께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런 소란 한가운데 지델 상회가 있다.
 항구에 맞닿은 거리엔 상회들이 빈틈없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 상회들은 거대한 선박을 소유한 대부호들이 소유하고 있다. 지델 상회의 대(大)지델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을의 운영을 관장하는 30인 위원회[각주:13]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고귀한 신분이기 때문에 시끌벅적한 항구 쪽으로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항구 반대편에는 큰 길이라 불리는 질이 좋은 도로에 저택이 있으며 높으신 분들은 소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이자, 붉은 실크 양탄자가 깔린 곳인 그 저택에서 귀족들을 상대로 협상하기 때문이다.
 지델 상회의 거대한 장사판에서 국물을 받아먹는 쥐와 다름없는 존재인 나와 쟈드는 당연히 항구 쪽의 상사 건물로 향했다.

『그럼, 이만. 너무 신경 쓰지 마.』

 계산대 앞에 도착한 짐마차에서 내린 나는 쟈드에게 그런 위안을 받았다. 쟈드도 그 아이의 제안을 받고 난 후, 이는 돈벌이의 기회라고 생각해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을 텐데 조금도 낙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쟈드가 강철 같은 의지를 갖추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쟈드는 화물을 여러 도시로 옮기는 일을 맡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크고 작은 기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쟈드는 한두 번 기회가 무산된다 한들 또 다른 기회를 기대하며 다음 마을로 갈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시끌벅적함 사이로 사라져가는 쟈드를 배웅한 후, 큰 한숨을 내쉬었다.
 기죽어 있다고 한들 나아지는 건 없으므로 빨리 일터로 돌아간다. 더군다나 상회는 항구 못지않게 난리다. 며칠 전에 대량의 상품을 매입한 원격지 무역선이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이다.
 계산대에는 끊임없이 반입되는 상품이 수북하게 쌓여있었고, 나란히 앉은 장부 기재 계원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류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으로 쫓고 있는 사람들은 팔아 줄 때까지 끄떡하지 않는다고 다짐한 출입 상인들로 기본적인 구도는 항구와 다르지가 않다. 다른 점은 계산대에서는 항구와 달리 지붕과 벽이 있으므로 그들의 호통이 쩌렁쩌렁 울려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것이다.
 글자를 쓸 줄 알면 계산대에 앉아서 일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기에 앉아있으면 엉덩이에서 뿌리가 자란다고 할 정도로 힘든 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상회에서 중요한 직책으로 만약 저 곳에서 일하게 된다면 이교도와의 전쟁이 끝났을 때 서적상이 부활한다고 해도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웃고 넘기지만, 나는 서적상으로 이어지는 모든 가능성을 추구하고 싶다.
 다만 글자를 쓰고 읽을 줄 아는, 거기다 상회가 신용할 수 있는 존재가 매우 귀한 세계다. 지금도 계산대에서 피치노가 나를 향해 시선을 이따금 보낸다. ‘언제든 제자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너무 바쁘니 일 좀 거들어라 이 식충아‘라는 뜻이 뒤섞여 있었다.
 배가 불렀다고 비난하겠지만, 그 시선은 나를 꿈에서 현실로 되돌리는 무서운 거미줄이다. 나는 도망치듯 소란 속을 달리다 큰길로 향하는 좁은 길을 지나던 도중 취사장 앞을 지났다. 거기에는 이른 아침 일을 마친 일행에게 대접하는 아침 식사의 훌륭한 냄새가 났다. 그것은 치열했던 아침 전투에 참여한 사람을 위한 포상이다.
 그 냄새에 코를 벌렁거리고 있자 갓 구운 빵을 산더미처럼 쌓은 바구니를 안고 있는 여자아이가 뛰어왔다.

『으앗!』
『이봐요! 비켜, 비켜요! 뭐야, 서적상 씨잖아?』

 머리엔 흰 천을 감고 가느다란 팔은 드러낸 채, 주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소녀다.

『하나 먹을래?』
『괜찮아!』

 이쪽의 가슴을 툭툭 치면서 거절하자 주방의 소녀는 킥킥 웃으며 계산대 쪽으로 달려갔다.
 그렇지만 서적상 씨, 라고 부르는 것은 기분 좋은 호칭이다. 그 호칭만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도중에 과수나 약초 등을 심어 놓는 정원이 있지만, 이 계절에는 허전함만이 느껴진다. 더구나 지금은 재고 물품의 임시 보관소가 위치하고 있기에 실로 살벌하다.
 그 정원을 지나가면 돌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항구에서 시내 중심을 향해 비탈진 길로 상회의 현관에서 1층분의 높이 정도로 보인다.
 나는 곧장 큰길에 접한 【실크 양탄자가 깔린 저택】에 들어왔는데, 도착한 이곳은 실크 양탄자의 아래에 위치한 장소다.
 이곳은 상회 전속 장인들이 모이는 특수한 공방의 모임으로, 상회가 다루는 물건의 감정이나 복구를 하고 있다. 도시의 장인에게 일을 맡기지 않은 것은 취급하는 물건들이 고가인 데다가 장인 조합과 상인 조합이 자주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4] 만약 도시를 양분하는 장인 조합과 상인 조합이 충돌하게 되었을 때 귀족이 사들일 예정이었던 보석 세공을 마을의 장인에게 맡긴다면 소름 끼칠 정도의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큰 상회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공방을 두고 있다.
 공방에는 보석 장식품을 한 손으로 다루는 금 세공사와 은 세공사뿐 아니라 가죽 세공사나 목공 장인이 있어서 각각의 상회에 찾아오는 비싼 물건을 돋보이게 하거나 운송 과정에서 파손된 부분을 고치는 일, 앞으로의 운송 과정에서 부서지지 않게 하는 일을 맡고 있다.
 매일 막대한 양의 상품을 다루기 때문에 이곳에는 업무가 많아 어떤 공방이든 장인들이 일찍부터 일을 하고 있다.
 간간히 금속이나 나무를 두드리고 가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단단한 소리는 착실하게 실적을 쌓고 있는 현실의 소리다. 안개를 파는 일을 꿈꾸는 견습생인 나는 왠지 기분이 나빴다.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이고 걸었고 공방 장중 가장 안쪽에 구석에 위치한 공방 앞에서 멈춰섰다.
 그 공방의 문에는 청동판이 걸려있고, 한 문구가 당당하게 적혀 있다.
 ― 신의 지혜와 가호가 함께하기를.
 서적상이 활약하던 시절에는 이 공방도 활기찼다. 돈을 벌어다 주는 상회의 기둥 중 하나로 당당히 꼽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십 년 전의 일로, 지금은 대장 1명과 제자 1명이 있는 외로운 곳이다.
 그리고 이곳이 내 직장이자 집이고, 이 상회를 거쳐 가는 모든 책이 들리는 곳이며 아직 내가 꿈과 이어진 실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내가 인사하자 방 안쪽에서 책 무더기가 움직인 것 같았다. 그것은 착각이라고 할 수 있고 아니라고 할 수 있었는데, 말 그대로 사람 1명의 키 높이로 양피지가 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커다란 둥근 허리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광용 유리 창문 밖에 매달려 있는 촛대엔 아직 촛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곳에서 밤새도록 작업을 한 듯하다. 촛불이 밖에 있는 것은 그을음 때문에 책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종이와 접촉하지 않는 장소에 촛불을 두고 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종이와 한 장소에서 촛불을 써서 일하면 안 된다는 도시의 방화 규칙[각주:15]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스승님.』

 내가 부르자 흔들거리던 허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굵은 두 팔이 천장을 향해 뻗으며 하품 소리가 났는데 아마 소가 하품을 하면 그런 소리가 날 것이다.

『끄응. 벌써 새벽인가.』

 대장이 일어나자 막강한 용병도 길을 비켜설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 방으로 반입되는 인쇄된 책들을 모조리 먹어치워 버리는 바람에 배에 기름진 지방이 잔뜩 끼어있는, 그런 생물 같았다.

『계산대 쪽은 슬슬 아침 식사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나의 스승이자, 책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작업도 해내는 붓쵸 대장은 중구난방으로 뻗어있는 수염을 손으로 쓸었다. 세밀한 작업을 했기 때문인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쳐다보는 것이 무서웠다. 일이 줄어든 탓에 몇 번이나 폐쇄될 뻔한 공방을 지켜낸 것도 상회의 다른 간부들을 이 무서운 얼굴로 제압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내가 제자를 희망했을 때도 그 끔찍한 형상을 띄며 쫓아냈지만, 결국 꿈에 대한 열정이 공포를 이겨냈었다.
 붓쵸 대장이 나를 인정해 준 것은 그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은 뭐냐. 볶은 마늘에 눈처럼 하얀 소금을 묻힌 소의 옆구리 살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침을 삼킨 것은 먹음직스러운 모습이 상상했기 때문이고, 이걸 아침부터 먹었다간 토할 수도 있을 텐데, 라는 이중의 의미다.
 하지만 철야를 하고 맞이한 아침이기에 분명 몸이 거부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름기가 도는 것이 먹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 스승은 몸이 거부할 리 없는 분류의 사람이며 그 또한 호걸답다고 할 수 있다.

『원하신다면 주방에 말해 만들어 오겠습니다.』
『음? 흠…. 아니, 그만두자. 요즘 배에 살이 쪄서 이렇게 돼버렸으니. 여기서 더 찌면 작업대를 배 둘레 만큼 잘라내야 해.』
『유명한 신학 박사님 중에서도 그랬던 분이 계셨습니다.』[각주:16]

 식탐은 죄[각주:17]라는데, 모순이 많은 교회다.

『흠. 하지만 그놈들은 뱃속에 1, 2개 물건을 더 담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단칼에 반박한 붓쵸 대장은 배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본다.
 나는 붓쵸 대장의 그 침묵의 시간에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 친구와 함께 맡았던 업무 말인데….』
『오오, 그래. 너에게 전해야 할 게 있었지!』

 그런 말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마치 그랜든 수도원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차피 안될 것은 뻔히 알고 있었으니,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가 물어뜯을 기세로 물고 늘어질 것을 우려하는 걸까. 그렇다면 잠시 시간을 비워두고 넘어간 후 적당한 기회를 봐서 말하려나?
 자, 너는 잠깐이나마 꿈을 꿧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서적상이 될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얌전히 미래가 보장되는 상회에 가서 도움 되는 일을 처음부터 다식 시작해라. 그동안의 은혜에 대한 보답은…이라는 말을 하겠지.
 내 머릿속에는 그런 대화를 몇 년 치까지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려는 말들은 모두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다시 한번 흐름을 탄다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도 알고 있다. 
 잠시 후 스승이 한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수도원으로 갔을 때, 널 만나러 온 인물이 있다.』

 그것은 어차피 나를 받아줄 다른 스승에 대한….

『이름이 뭐더라…. 아, 몇 년 전 너를 이곳에서 끌어냈던 이단심문관이었다.』
『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전의 그 사기꾼 말이다. 도시에서 열리는 교회의 공회의[각주:18] 참석차 온 김에 들린 거 같았는데, 무슨 낯짝으로 찾아온 것인지! 글을 읽을 줄 똑똑한 아이를 보내면 교황청에서 키워준다는 헛소리를 믿으시고, 교황청과 관계를 만들고 싶어서 널 보낸 대(大) 지델님도 문제였지만!』

 붓쵸 대장은 두꺼운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 이단심문관은 6여 년 전 그날, 어떤 의미에서 나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다. 상회의 장서만 읽고 세계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며 절망에 빠진 나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의 원래 목적이 아니었다. 그 이단심문관은 자신이 교황청의 도서관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그것을 이유로 노예 노동 인력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읽고 쓰기를 잘하는 아이들은 쥐와 거미가 기어 다니며 종일 햇빛이 들지 않는 교황청의 거대한 도서관에 던져졌다. 그곳은 오랜 역사 속에서 지하 묘지나 감옥용으로 사용된 장소로 음침한 지하의 복도에서 곰팡이와 먼지투성이인 책을 깨끗이 하게 하고, 어디에서 들어온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새나 개의 사체를 치우며, 그 외의 시간엔 오직 책의 목록을 제작했다. 실제 노예를 다루는 이처럼 채찍을 들고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던 미로 같은 도서관에 갇혀있었고, 동료 대부분이 마음을 병을 앓으며 곁을 떠났다.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거기에 읽은 적이 없던 책이 무한히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결국 버티지 못했고,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도서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석벽의 빈 구멍에 놓인 해골과 함께 오래된 시편[각주:19]을 손에 쥔 채 시체와 다름없이 쓰러져 있던 나를, 우연히 담력 시험을 한 젊은 부제[각주:20]들이 발견해 구조했던 것이다.
 내가 그곳에 일했다는 것은 교황청에 근무하는 대다수의 사람이 몰랐던 데다, 알고 있던 사람들도 내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라며 소동을 일으켰지만 결국 상회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몇 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지만 상회로 돌아온 반년 동안 앓아누워있었다.
 그 지경이 되자, 이 모든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지델님은 내 손을 잡고 경솔했던 자신의 판단을 깊이 사과했다. 귀족이지만 참으로 겸손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내가 상회 내에서 식충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던 것은 붓쵸 대장의 비호뿐 아니라, 이 일이 벌어진 바람에 지델님이 특별히 배려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작 나를 속여 꾀어낸 이단심문관이 그때 뭘 하고 있었냐면 나와 함께 그 어두운 도서관을 기어 다니며 책을 찾아다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것이었다. 다시금 떠올려 보면 귀중한 책들을 읽는 것만으로 만족했기 때문에 우리를 내버려 두고 외부세계로 돌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은 최악의 쓰레기라고 불렸지만 나는 그를 크게 미워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도서관에서 그 녀석을 발견했을 때는 언제나 즐겁게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남자가, 아직도 나를 기억해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스승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그래서요?』
『음. 그래서 네가 서적상이 되려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하자, 크게 웃더라고.』

 그러니 너도 어지간히 꿈을 깨라, 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아 내 얼굴이 크게 뒤틀렸다.

『그리고 네가 갔던 그 수도원 이야기를 했더니 엄청나게 질문을 해대더군.』
『네?』
『아무래도 그 수도원에는 어느 귀족이 모아놓은 책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무엇보다 그놈의 책에 대한 열의는 예전 그대로…. 아니, 내 배보다 더 커진 거 같았거든.』
『….』

 나를 이 상회의 서고에서 끌어내고 무한한 서적의 세계에 떨군 장본인.
 그리고 그 남자는 나 이상 책에 미쳐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그곳에 납품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물고 늘어졌다. 결국은 대(大) 지델님도 그 끈기에 포기하고 귀찮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지.』
『그렇다는 건?』

 내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고 본 것은 어딘지 모르게 붓쵸 대장의 싫은 듯한 얼굴에서 다음 이야기의 흐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너 말이야.』

 라며 붓쵸 대장은 짜증을 내 듯 팔짱을 끼고 말했다.

『2주 후, 그 괴짜를 데리고 다시 수도원으로 가거라.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몸종이 필요하다고 하더군.』

 설마 했던 기적이다.

『하지만 깊이 관여하지 마라. 이번에도 감언이설에 넘어가게 되면 이번에는 몇 년 동안 갇힐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을 거다.』

 붓쵸 대장은 자기일 같이 그런 말을 해주었지만 나는 다른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그 문을 두드릴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전력을 다해 대답했다.

『네!』

 그러자 붓쵸 대장은 반대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적 매매는 절망적일 정도로 거래가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복원이나 운반 같은 의뢰라면 극소수지만 어느 정도 수요가 있다.
 장서가는 서로의 책을 빌린 후 사본을 만들어서 장서를 늘려간다. 그때 책의 외관이 좋지 않으면 체면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성대하게 돈을 쓴다. 가끔 서로에게 책을 빌린 장서가들이, 상대보다 호화롭게 해달라는 경우도 있다.
 나는 금 세공 같은 작업은 너무 서툴러서 대부분 도와주지 못하지만, 복원 담당 장인에게 지시를 전달하거나 오자 수정을 위해서 양피지의 문자를 깎는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틈틈이 고객들의 책을 읽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일을 몇십 년 계속해봤자 어떤 분야에서 자리를 잡을 확률은 극히 적다. 쭉 말단인 채다. 게다가 일 그 자체가 언제까지 있을지 모른다.
 쟈드나 동기들이 착실히 상회 안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양치기의 아들에서 왕이 된 우즈워스가 저술한 희망의 책, 【황금의 나라】를 방패로 내세워도 막아내지 못할 정도의 현실이 덮쳐온다. 일이 끝난 후 독서에 전념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는 순간, 울음이 터질 것 같을 때가 있다. 이대로 괜찮은 건가? 정말로 좋은 건가? 하고.
 하지만 다시 한번 그 수도원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좌절하는 건 그 이후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 그, 나보다도 더 책에 미친 남자와 또다시 만날 수 있다.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만나면 뭔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사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적에 푹 빠진 생활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라는 것.
 그러나 그 후, 2주 동안 그 이단심문관과는 만나지 못했다. 나와 엇갈려 상회에 온 이후 한 번도 상회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에서 열린 고위성직자들의 공회의에 맞춰 도시를 들렀다는 말에 공무가 바쁜 걸까 라는 생각을 했으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마을에 있는 호사가나 교회의 서고를 모조리 살펴봤다고 한다.
 과연 나 같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이용하면서까지 교황청 도서관에 발판을 마련하고는,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닥치는 대로 전부 읽은 후 망설임도 없이 어딘가로 떠나버린 남자답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구나. 어째서인지 그런 묘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런 이유로 수도원에 가는 당일 재회는 감동적이지는 않겠지만 나는 묘하게 얼굴이 히죽거리는 이상한 기대감에 들떳다.

『조금은 진정하라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부석 위에서 이단심문관을 기다리고 있을 때, 쟈드는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수도원은 도망가지 않아.』
『시끄러워.』

 처음 그 이단심문관과 만났을 때 나는 무엇 하나 모르는 어린애였다.
 그저 압도당하고 농락당했을 뿐이었지만 눈이 뜨인 지금이라면.
 이제 휘둘리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녀석을 읽고 내용물을 먹어주겠어.
 그런 흥분에 거머쥔 주먹을 와작와작 깨물었다.

『그나저나, 늦네….』

 쟈드가 한숨을 섞으며 말한다.

『시장의 개장을 알리는 종이 울려버렸다고.』

 마을이 움직이는 건 모두 종소리로 정한다. 시장을 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시벽에 있는 문도 열려, 마을은 단숨에 눈을 뜬다. 가도가 있긴 하지만 군용 짐마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은데, 그곳을 통해 수많은 짐마차와 여행객이 일제히 오가기 때문에 길은 쉽게 붐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대상회의 특권으로 시벽을 빠져나가 아직 비어 있는 가도를 거침없이 갈 예정이었지만, 중요한 이단심문관이 오지 않았다.

『으음… 잠깐, 심부름꾼을 보내고 올게.』

 납품 도중에는 무엇이든 혼자서 판단해야만 한다. 쟈드는 마부석에서 휙 내려와 집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던 어린 꼬마를 심부름꾼으로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 쟈드는 허둥지둥 출발했다.
 이단심문관이 머문 곳과 시벽에서 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얘기를 듣고 온 꼬마는 터무니없는 소리했기 때문이다.
 흑의를 두른 이단심문관님은 새벽이 오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고 출발해버렸다는 이야기.

『높으신 분의 변덕에는 정말 질렸어!』

 쟈드는 크게 외치면서 짐마차를 질주시켰는데, 덜컹덜컹 흔들리는 짐마차의 짐칸에서 나는 왜인지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신기하게 기분 좋은 패배감으로, 분명 그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114권의 책을 읽고 세계를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세계에는 10만 권 이상의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때와 같은.
 그 이단심문관은 여전하다. 아니, 그 때 이상으로 괴이하고 기발해졌다.
 코레드 아브레아.
 나는 히죽대는 얼굴을 억누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6년만인 재회는 물론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예상은 했었지만 사실은 조금 더 극적인 것을 예상했었다.
 똑같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어린아이가 할법한 그런 생각을 했었다.

『….』
『….』
『….』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상황은 생각하지 못했다.
 도로에서 미친 듯이 달려가 아브레아의 뒤를 따라잡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었다. 지평선 너머에 서 있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흑의를 몸에 걸치고 있는 데다가 책을 읽으면서 걷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눈에 띈다. 아마 알몸으로 걷는 쪽이 인상에 남지 않을 정도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고, 몇 명은 이쪽에서 먼저 묻기도 전에 이런 이상한 사람과 지나쳤다며 즐거운 듯 얘기했다.
 나와 쟈드가 그를 따라잡은 건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쟈드가 짐마차의 속도를 떨어뜨려 옆에 나란히 가도 아브레아는 여전히 사과를 베어 물면서 책을 탐독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신이 준 지혜의 과실[각주:21]조차도 그런 식으로 책을 읽으면서 먹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쟈드가 지델 상회에서 온 사람이라고 알리자, 아브레아는 얼굴을 들더니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짐칸에 뛰어 올라탔다. 내가 인사를 할 틈조차 없다. 몇 년 만의 재회이기도 하고, 일단 심부름꾼으로 불려온 건데 요만큼도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무거워 보이는 짐을 걷어치우고 자신이 누울 공간을 억지로 만들어 자리를 잡은 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잘 만들어진 석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가끔 페이지를 넘길 때 손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쪽에서 말 같은 것을 건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하지만 내 안에는 질문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 책은 뭡니까. 마을에는 어떤 책이 있었습니까. 지금까지 어떤 책을 봤습니까. 교황청에 있는 도서관에서는 어떤 책을 찾고 있었던 겁니까.
 가끔 흑의에 달린 후드 사이로 엿볼 수 있는 얼굴은 여전히 이단심문관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잘 생긴 남자이며 동안이고 키는 크지만, 허약한 나라도 싸움을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몸은 가늘다.
 하지만, 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은 무시무시한 박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누구도 다가오는 것을 막아내고 있다.
 그에게 말을 거는 게 허락된 건, 온갖 지식의 원천인 신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상태라서, 저녁밥도 쟈드가 준비하기 전에 혼자서 냉큼 주머니 속에서 빵을 꺼내 입에 꽉꽉 욱여넣고 포도주로 흘려 넘겼다. 쟈드마저 눈을 둥글게 뜰 정도로 품위가 없었지만, 그건 품위가 없다기보다 식사를 증오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분명, 식사하면 졸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며, 졸음은 독서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브레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다.
 날이 저물어도 양초에 불을 붙여 태연히 계속 책을 읽는다. 모닥불 옆에서 읽지는 않는 건가 생각했지만, 모닥불은 불꽃이 흔들려 읽기 어려운 듯, 불쾌해 보이는 얼굴로 짐이 만든 그늘에 숨었다.
 나와 쟈드는 눈짓만으로 대화하고, 일찌감치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아브레아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아마 밤새도록 일어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잠에 빠질 때까지 계속 읽다가, 문득 잠에서 깬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서를 재개했던 거겠지.

『도착했습니다요.』

 꼬박 하루 만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쟈드는 마차를 세웠지만, 짐칸에 있는 아브레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짐칸에서 내리자 쟈드가 팔을 붙잡아 석벽 쪽으로 데려갔다.

『어쩔 거야, 저거.』

 쟈드는 목소리를 낮추고 처치 곤란한 물건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을 짐칸으로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해도 알 리가 없다.

『게다가, 갑자기 저런 거 데려가도 괜찮은 걸까?』
『글쎄. 하지만 흑의의 이단심문관이라고 하면 조사목적으로 각지에 있는 수도원의 서고를 자유롭게 열 수 있다고 들었어.』

 정사성(正邪省)이라 불리는, 이단인지 아닌지를 조사하는 교황청의 기관[각주:22]에 소속되면 이 세상의 어떤 장소에도 신의 이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다만 6년 전을 떠올려 보면 수도에 있는 교황청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했던 걸 봐서는 단순한 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랑 함께 올 필요가 없잖아?』
『어디까지나 소문이야. 그냥 걸어서 오는 게 싫었던 게 아닐까.』

 쟈드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움직이는 기척조차 전혀 없다고. 네 스승이잖아? 말 좀 걸어봐.』
『뭐?! 아니, 딱히 스승은 아닌데….』
『너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이잖아? 정육점과 생선 가게도 주사위놀음 때는 사이가 좋아지잖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나와 쟈드가 소리를 죽이고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느닷없이 짐마차 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몰래 훔쳐 먹다가 들켰을 때처럼 동시에 멈춰 서서 그쪽을 봤다.

『후아암. 흐음, 도착했습니까?』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랬듯이 경박한 어조였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나는 쟈드를 힘껏 앞으로 밀어냈다. 쟈드는 이 자식,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몸집이 크고 상회에서 제 몫을 해내고 있는 사람이니까 응당 그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 훌륭한 수도원이군요―.』
『어, 그러니까…. 예, 그랜든 수도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정사성에서 심문관이 왔다고 전해주세요. 문이 열리면 짐마차를 도서관 앞까지 부탁드립니다.』

 말을 끝내고 아브레아는 자신의 짐 안에서 또 다른 책을 꺼냈다. 얼굴을 들었던 것은 마침 책을 다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나도 거침이 없어서 의문이나 의견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말을 들으니 역시 소문대로 이단심문관이라는 직함은 어떤 수도원의 대문이라도 열어젖혀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 그랜든 수도원의 장서를 볼 수 있고, 사서와 교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대에 부푼 채 쟈드의 어깨를 쳤다.

『그렇다는데!』

 돌아본 쟈드는 화를 내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지델 상회입니다! 오늘도 약간의 성의를 바치러 왔습니다!』

 2주일 전과 같은 말로 다시 문이 열렸다.
 얼굴을 보인 것도 그때와 똑같은 꼬마로, 쟈드 뒤에 있는 나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지만 고함을 치지도, 문을 닫지도 않았다.

『조합 참가를 위한 의식이 생각나네.』

 도시의 장인조합에 들어갈 때는 스승의 공방 앞에서 3일간 계속 앉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습이 있다. 지금에 와서는 거의 흉내만 낼뿐이지만, 거절하고 또 거절해도 그 공방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열심히 바란 장인의 이야기에서 관례화된 것이다.
 단지, 상품을 옮기고 판로를 넓힐 역할도 맡고 있는 쟈드 같은 직업에서는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쓰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2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적의도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이전엔 여러모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물론 사과한 건 내 쪽이다. 갑자기 고함을 듣고, 내쫓겨도 상인이라면 미소 띤 얼굴로 머리를 숙이라는 것이 선배 상인의 가르침이었다.
 꼬마는 아무 말 없이 외면하고 있었다. 후드를 깊이 뒤집어쓰고 입가를 천으로 덮고 있어서 표정은 거의 볼 수 없지만 불쾌하다는 것이 삼베 옷 안쪽에서 배어 나오고 있다.
 쟈드는 이미 짐을 내리기 시작한 것 같았지만, 나는 아브레아의 지시를 실행하기 전에 살짝 욕심이 났다.
 아브레아가 이단심문관이라는 사실을 전한다면 순조롭게 문을 열 수 있겠지만, 그 전에 자신의 힘으로 열 수 있을지 어떨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고대의 서적상이 자주 다니던 수도원의 문을 열어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서적과 만난다는 모험에 조금이라도 좋으니 닮고 싶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내가 주저하고 있자 꼬마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장님은, 만나 주지 않는다.』

 단호한 말투.

『사서 같은 건 없어.』

 매달릴 부분이 없다는 건 이런 것이지만, 사서라는 말에 나는 확신했다.
 쟈드도 사서라는 단어를 몰랐던 것처럼, 그건 누구나가 아는 흔한 직함이 아니다. 그 특별한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은 수도원 안에 사서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 부분을 의지하려고 생각했을 때 문득 깨달았다.

『당신, 어딘가 아파 보이는 데?』

 꼬마에게 너라고 부르는 것에 망설여져서 당신이라고 했지만, 꼬마가 움찔 놀랐던 건 결코 그 호칭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괴로운 듯 문에 기대고 있던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놀라서 몸을 대문에서 떼자, 그대로 반대쪽으로 휘청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아, 역시나─.』
『들어오지 마!』

 날카로운 일갈이 날아왔다.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외부인을 안에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라도 내린 건지, 아무튼 꼬마의 태도는 완고했다.
 나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기에 끄덕이고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꼬마는 방심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며, 고작 그런 일을 한 것만으로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진정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이쪽으로 들어오지 마….』

 꼬마는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사정이 다르거든요.』
『?』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건지 꼬마는 멀리 있는 뭔가를 보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며 대문을 붙잡고 있었다.

『실은 이 수도원의 장서를 보고 싶다는─.』
『아직입니까?』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정사성의 이름을 말해도 문을 열지 않을 줄은, 어찌하여 이렇게 신앙심이 모자란 건지.』

 돌아보니 코레드 아브레아가 서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설명을 하기 위해 꼬마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살벌한 눈이 경악하듯 크게 떠 있었다.

『문을 여십시오. 장서를 확인하겠습니다.』

 아브레아가 그렇게 말한 직후였다.

『─읏!!』

 꼬마가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그 가느다란 몸으로 무거워 보이는 문을 힘껏 당겨 닫으려고 했다. 내가 뭔가를 말할 틈도 없다.
 하지만 자신 안에 있는 또 다른 이가 과감한 행동에 나섰다. 몸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문의 빈틈으로 발을 억지로 들이민 것이다.
 쿵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끄아아악, 아파아앗─!』
『잘하셨습니다!』

 그 순간 나를 뒤로 잡아당겨 넘어뜨린 아브레아가 넘어진 내 위를 뛰어 넘어갔다.
 마치 그림자가 지나간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흑의를 마른 몸에 두른 아브레아의 움직임은 민첩했다. 내가 발을 끼워 확보한 틈으로 긴 팔을 뻗어 꼬마를 붙잡아, 그대로 억지로 몸을 미끄러져 들어가고 어깨와 등으로 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그 일련의 움직임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데에 익숙한 인간 특유의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아, 안 돼!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말아줘!』

 꼬마가 묘하게 앳된 어조로 아우성쳤지만 아브레아는 꼬마를 부지 안으로 질질 끌어내 사정없이 내던졌다. 가벼워 보이는 몸이 내 위를 날아 지면에 쓰러진다. 굉장히 난폭한 모습이었지만, 한편으론 과연 이단심문관, 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때야 겨우 일어섰다. 발에 통증은 있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흑의를 두른 남자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져간다. 꼬마는 등을 제대로 부딪친 듯, 마른기침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 안 돼…. 들어가지…. 말아줘…. 콜록, 콜록….』

 괜한 저항을 했기 때문이라고 냉정하게 생각이 든 한편,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고, 결국 그쪽이 이겼다. 이 꼬마가 이런 꼴을 당한 원인의 일부분은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저기, 괜찮아?』
『들어…. 가지….』

 일어날 힘도 없는 듯, 기어서 아브레아의 뒤를 쫓으려고 한다.

『아, 이봐!』

 하지만 꼬마는 떨리는 손을 뻗은 채, 그 자리에 폭 엎어졌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어 안아 들었다.
 직후, 그 가벼움과 로브 아래에서 느껴지는 깡마른 몸에 섬뜩함을 느꼈다.

『너, 너, 밥 제대로 먹고 있는 거야?』

 무심코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 와중에도 꼬마는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의미를 담은 말을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구나 서지도 못하는 상태임에도 쫓아가려고 했기에 나는 황급히 막았다.

『조금 진정하라니까…. 응?』

 그리고 뒤에서 겨드랑이 안쪽을 통해 몸을 붙들었던 그 순간이었다.

『뭔가, 지금, 부드러운 것이….』
『어이.』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엄청 난폭하구만. 이단심문관님이 자유롭다고 해야 하나.』

 목소리는 쟈드의 것이었지만, 나는 뭔가 매우 나쁜 짓을 들킨 것처럼 두근거렸다.
 아니, 설마, 하지만, 그런.
 그런 말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 쟈드에게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소란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건 이상한데.』

 그건 아브레아가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기에 모두 그쪽에 정신이 팔린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쟈드가 이어 말했다.

『아니, 그렇지도 않나.』
『?』

 나와 꼬마를 지나 건물 안에 들어간 쟈드는 허리에 손을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거지?』

 쟈드는 그런 소리를 하면서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가려고 했지만, 어느 틈엔가 품 안에 있는 꼬마가 조용해졌다. 기절해버린 건지 축 늘어져 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무서워져 후드와 복면을 벗겼다.

『앗!』

 나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침묵만 있었다.
 그리고 꿈처럼 깰 리도 없었다.
 내 품 안에 있던 건 꼬마가 아니다. 머리카락을 후드 안에 억지로 넣은, 앙상한 소녀였다.
 자신과 키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데 연하로 보이거나, 당황했을 때의 어조가 어리게 느껴졌던 건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수도원에 여자아이가….』

 그 사실도 그렇고, 꼬마라고 생각했던 소녀의 맨 얼굴을 보고 나는 좀 더 커다란 의문을 품었다.

『이 아이, 혹시 귀족 아닐까?』

 출신은 얼굴에 나온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소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기품이라는 건 또 다른 것이다. 이 소녀에게는 상회에서 때때로 본 귀족에게서 나는 그런 느낌이 난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차림으로….』

 그런 사나운 눈을 하고 있었던 건가.
 게다가 애처로울 정도로 말랐다.
 마치 수십 일 동안 단식한 것 같았다.

『이래선 진짜 은수자[각주:23] 같잖아. 아니면, 일부러 단식하고…. 응? 단식?』

 그때 나는 문득 책에서 본 것이 떠올랐다. 단식하는 사람에게는 달콤한 향기가 난다고 했다. 쟈드가 흥분했던 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다.

『….』


 이런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게다가 꾀죄죄한 남자아이라면 주저했겠지만, 여자아이다.
 나는 조용히 주위를 쓱 둘러본 후 품 안에 축 늘어진 소녀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대봤다.
 지저분하지만 마을에서 가끔 본 부랑아 같은 냄새는 나지 않는다. 춥기 때문인 걸까. 코를 비빈 후 좀 더 다가 가봤다.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카락이 코에 닿아, 폭신한 향이 풍긴다. 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양지에서 볕을 쬐고 있을 때의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아앗!』

 나는 등을 펴고 외쳤다.

『아, 아니, 이건─.』
『아─! 뭐야, 여자애냐!』
『자, 잠깐 기다려, 오해야, 이건 이유가―.』

 횡설수설 변명하는 나에게 쟈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자아이에게도 흥미가 없는 듯,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수도원 부지 안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뭐야, 곤란하게 됐네.』

 그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쟈드?』

 내가 묻자, 쟈드는 한숨을 내쉬고 내 쪽을 봤다.

『이리 와봐.』
『?』

 의아한 듯 쳐다봐도 쟈드는 오라고 손짓을 할 뿐이다.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가 품 안에 있는 여자아이를 떠올린다. 놔둘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꺼림칙할 정도로 가냘파서 결국 안아 들고 쟈드 곁에 섰다.
 그 직후, 싫어도 깨달았다.

『앗, 이건….』
『우리들이 옮겨온 짐이야.』

 거기에는 지델 상회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 음식 같은 것이 산적해 있었다.

『2개월분 정도군. 추우니까 썩지도 않았고 비도 맞지 않았으니까 벌레가 생기지 않은 것 같네.』

 항아리 뚜껑을 열어 향을 맡더니 가볍게 마셨다. 포도주인 것 같다.

『크으, 맛있어.』
『어, 어이, 쟈드.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쟈드는 나를 보고 입술을 오므렸다.

『사람 같은 게 어딨어?』
『아니, 하지만』

 그때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쟈드가 한 말의 이유를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시간인데도 건물 어디에도 나무 창문은 닫혀 있어. 정원도 청소는 되어 있지만 손질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고. 게다가 분위기를 봐. 사람이 없는 장소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고.』

 중정[각주:24]은 직사각형으로 입구 정면에 커다란 2층짜리 석조 건물이 있고 왼편 안쪽에는 종루가 있는 교회가 서 있다. 오른쪽에는 여물 같은 것이 어지럽게 있어 본래 마구간이었다고 생각되는 건물이 있지만 동물은 없고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마구간 안쪽에도 건물이 몇 개 있고 밭으로 보이는 장소도 있었다.
 그리고 쟈드가 말한 것처럼 그 여기저기에 다 베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풀이 시들어 있다.

『사람이 없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왜 사람이 없는 거지?』
『….』

 내 질문에 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항아리를 두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아, 기다려!』

 내 말 따위 듣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소녀를 품에 안은 채 넓은 중정을 걸어갔다.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사람은 사람. 게다가 나는 힘이 약한 수습 서적상이었다. 점점 힘이 부쳐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할 때가 돼서야 겨우 중정에 인접한 가장 커다란 건물에 도착했다. 문 앞에 있는 돌계단에 앉히고 벽에 기대어 두었는데 짐마차의 짐칸에 있는 모포라도 덮어주면 좋겠는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이만큼 소란을 피워도 예상대로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사람이 없는 건가?』

 시험 삼아 문에 손을 대봤지만 잠겨 있지 않았다.

『실례, 하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말한 후 문을 열어봤다. 안은 유복한 수도원에 어울리는, 돌계단에 주홍색 카펫이 깔렸었다. 아무도 없다고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건 새하얀 먼지가 엷게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

 나는 문을 닫았다. 살짝 무서웠던 것도 있다. 이 수도원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쳐도 어째서 이 소녀만 여기에 있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저주받은 수도원의 전설을 떠올렸다. 수도사가 계속해서 악마에게 습격당해 산송장으로 계속 떠도는 전설 말이다. 난로 구멍은 지옥과 연결된 번견[각주:25]의 입으로, 생전 계율을 깬 자들이 번견의 이빨에 등이 도려지는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들락날락한다고 한다.
 설마 이 녀석은 그중 한 명으로 여기를 방문한 얼간이를 꾀어들기 위해….

『필』
『우와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홱 물러섰다. 보니 쟈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큰 소리 내지 마, 바보야.』
『쟈, 쟈드였구나.』

 부끄러워질 여유조차 없었다.

『저, 저기, 쟈드, 여긴….』

 그렇게 이야기하려 하자 쟈드는 제지한 후 손짓했다.

『따라와.』
『….』
『아무도 없는 이유를 알았어.』

 그렇게 말하는 쟈드 뒤를 마지못해 따라가려고 했을 때 소녀가 걱정되었다.

『얼마 안걸려. 자, 오라고.』

 쟈드는 지체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번 소녀를 바라보고 나서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서 덮어주고 나서야 쟈드를 따라갔다 향한 곳은 교회 뒤쪽.
 그리고, 그런 장소에 뭐가 있는지는 뻔하다.

『이건.』

 수많은 묘였다.

『엉성한 묘표(墓表)인데 적혀 있는 날짜와 이름이 보이지?』
『그, 러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뿐이야. 안쪽부터 순서대로 묻은 걸까. 마지막 날짜는…. 2개월하고 1주일 전이네.』

 쟈드가 말했다.

『역병이군, 분명.』
『역병?』
『스승님과 선배 동료들에게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어. 자그마한 집단이라면 이런 일이 가끔 있다고. 같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고, 같은 냄비로 밥을 먹고 어쩌면 같은 방에서 일상생활을 하니까. 한꺼번에 당한거래.』
『그럼, 저 여자애는….』
『여기가 사람이 없는 걸 기회삼아 자리 잡은 부랑아일까』

 쟈드의 의견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을 안이라면 모를까 여기는 외딴 수도원이다.
 게다가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부랑아라면 고지식하게 짐을 받으러 나오지 않겠지. 가령 지혜를 발휘해서 쟈드를 속이려고 해도, 뭐랄까.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었던 거 아냐? 적의를 드러낼 거라면 처음부터 대응하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아 보이는데.』

 게다가 쟈드는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그 여자아이의 용모에는 기품이 있다. 뭔가 사정이 있어 수도원에 있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단순히 생존자겠네. 생존자로서 운이 좋은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생존한 거라면 기적이잖아.』
『그런가?』

 쟈드는 시선을 묘지로 향했다. 나도 따라서 그쪽을 보곤 깨달았다. 볼품이 없이 삭막하고 쓸쓸한 풍경에 엉성한 묘표만이 나란히 서 있는 묘지. 그곳에 혼자서 사체를 묻는 소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나 바싹 마른 몸과 너덜너덜한 손으로 구멍을 파고 묘표를 세운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보니 묘표에 기록된 글자는 지독하게도 휘갈겨 있었다.

『뭐, 부랑아라고 한다면 저렇게 마를 이유가 없긴 하지.』

 쟈드는 팔짱을 끼고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했다.

『생존자였다면 이해가 돼. 단순히 괴로워서 먹지 못했던 거겠지.』

 주위는 조용하여 어떤 소리도 하나 나지 않는다.

『어떻게 할래?』

 내가 묻자 쟈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그 아이에게 얘기를 듣는 수밖에 없겠지. 그러고 나서 상회에 연락해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상담해야지. 그 이단심문관님께서 뭔가 상식적인 해결을 해주리라는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군.』

 나는 소녀 곁으로 돌아가 쟈드가 부지 안을 탐색한 후 찾아낸, 이 소녀가 생활했을 것 같은 장소로 옮겼다.
 그곳은 내가 가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도서관이었다.






  1. 16세기의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가 자신의 자서전인 '예수의 데레사의 삶'(The Life of Teresa of Jesus)에 기록한 내용을 작가가 각색한 것이다. 해당 책에는 천사의 창에 찔린 데레사가 크나큰 고통과 함께 강렬한 애무를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임을 직감하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더욱 깊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제작한 “성 데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esa.)이 바로 이 상황을 묘사한 조각상으로, 현재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전시되어 있다. [본문으로]
  2. 작중 붓쵸라는 인물의 이름은 8명의 교황을 섬긴 비서이자, 피렌체 총독, 그리고 책 사냥꾼으로 유명한 인문학자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ini)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포조는 작가가 본 작품에 활용했던 “1417년, 근대의 발견”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3. 11세기부터 13세기 중세 유럽에선, 귀족들 사이에선 자신의 책 표지를 보석등으로 꾸미는 것이 유행이었다. 책 표지 장식은 미술가, 조각가, 금은 세공사들이 맡았는데 필의 스승이자 서적상인 붓쵸가, 금 세공장인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본문으로]
  4. 이 일렬의 행위를 장정(裝丁, 책을 제본하는 것.)이라 부른다. [본문으로]
  5. 중세의 바르디 상사, 페루치 상사등과 같은 큰 규모의 상사들이 모티브로, 이 상회들을 일컬어 중세의 "초대형 상사(super-companies)"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초대형 상사의 정의는 유럽 주요 시장에 세운 사업 지부를 통해 대규모 상품 거래와 국제적 규모의 상업 활동, 국제 수준의 은행업과 제조업 등 다양한 사업 활동을 대규모로 전개한 회사이며, 혹자는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이들을 꼽기도 한다. [본문으로]
  6. 십자군 전쟁을 말한다. 제1차 십자군전쟁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선동,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로 인해 촉발되었다. [본문으로]
  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과학적인 탐구에도 열정적이었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이미 원자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발표했으며, 수학자였던 아리스타르코스는 지동설을 주장했으며, 천문학자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지름을 계산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보통 중세 수도원은 도심에 위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가장 엄격하게 수도원 규율을 지켰던 시토 수도원은 최대한 문명과 떨어진 외딴 곳에 수도원을 건설했다. [본문으로]
  9. 중세 수도원에는 왕족, 귀족, 상인의 후원이 잦았다. 이는 천국을 가기 위한 쉬운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중세시대에는 10대부터 결혼, 일등을 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유럽은 토지가 석회질이라 물이 탁하고 오염되기 쉬워 물 대신 맥주와 포도주를 마셨다. [본문으로]
  11. 중세 도시들은 대부분 도심 중앙부에 광장과 성당이 위치해 있고 그곳에 종이 설치되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일과의 시작과 끝, 시장의 개장과 폐장을 타종을 통해 통제했다. [본문으로]
  12. 遠隔地貿易. 11세기 중세 유럽의 도시간의 장거리 무역, 그 중에서도 사치품을 담당했던 무역을 말한다. 베네치아, 지중해를 중심으로 활발한 원격지 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에 대형 상회는 상선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13. 중세 도시 운영기구였던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를 묘사한 것으로 명칭의 경우에는 피렌체 공화국의 13인 위원회에서 따왔다. 도시참사회는 시장과 귀족,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독자적인 재판과 행정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 집단이었다. [본문으로]
  14. 중세시대엔 상업을 하는 이들이 만든 상인(商人)길드와 수공업자들이 모인 동직(同職)길드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들은 원래 하나의 길드로 출발했으나 ‘잦은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해 12세기 무렵부터 분리되었다. 그렇기에 두 길드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본문으로]
  15. 국왕 및 영주들에게서 자치권을 얻은 중세 도시들이 규정했던 “도시법”을 말한다. [본문으로]
  16. 토마스 아퀴나스를 말한다. 중세 최고의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워낙 뚱뚱해 배 둘레 형태로 책상을 잘라 사용했던 인물이었다. [본문으로]
  17. 가톨릭에서 규정하는, 죄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죄인 7가지 죄인 칠죄종(교만, 시기, 분노, 나태, 인색, 식탐, 색욕)을 말한다. [본문으로]
  18. Concilium. 그리스도교에서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교회의 대표자들이 모이는 회의. [본문으로]
  19. 詩編.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시가서. [본문으로]
  20. 副祭. 카톨릭에서 사제를 보좌하는 성직자. [본문으로]
  21. 아담과 이브가 먹었다는 선악과(고대 히브리어 פרי עץ הדעת)를 말한다. 신이 준 지혜의 과일이라 쓴 것은 작가가 오해한 것이 아니라, 선악과의 원 뜻에 가장 가까운 해석이다. 흔히 “선과 악을 나눈다.”고 해석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원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에츠 다아쓰 토브 워-라'인데 에츠는 나무고 다아쓰는 지식, 토브 워-라는 선과 악이라는 뜻이다. 사실 선악과는 상당히 잘못된 번역 중 하나로, 서로 상반된 2개의 것을 통하여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메리즘이라고 불리는 고대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이었다. 즉 '선과 악을 알게하는 지혜의 나무'라는 말에서 '선과 악'은 전체를 나타내기 위한 예시일 뿐이고, 실제 의미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게하는 나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본문으로]
  22. 중세 시대의 이단심문관들은 교황청 산하 이단심문소(異端審問所) 소속이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이단심문소는 16세기에 검사성부(檢邪聖部)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본문으로]
  23. 隱修者. 종교적인 동기로 인해 광야에서 고독한 삶을 수도자를 말한다. [본문으로]
  24. 中庭.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 [본문으로]
  25. 番犬. 경비견을 의미하는 단어로, 여기서 말하는 번견은 그리스 신화의 케르베로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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