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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제3막

(◉◞⊖◟◉) 2017. 6. 3. 22:43



『어째서 내가 장작을 패야 하는 거야.』

 라고 중얼거렸지만 쟈드는 무시한 채 빠르게 쌓여있는 장작을 들어 올리더니, 지금은 거의 쓰지 못하고 있는 수도원의 가장 큰 건물로 옮겼다. 그곳에는 식당이 있는데 날도 저물고 있었으므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식사를 하기로 해 지금 그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식재료들은 고급재료들이 남아돌고 있다.

『그걸로 빵을 만들어?』

 밀가루 반죽을 넣은 납작한 냄비를 든 나를 바라보며 클레어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난로에는 이미 쟈드가 피운 불이 타오르고 있다.
 큰 테이블과 의자가 몇 개 있긴 하지만, 쟈드와 클레어는 벽난로 앞 바닥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다. 가끔 청소한 듯 지금 당장 손님들이 와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러므로 사람이 살지 않은 장소인 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클레어가 평소 도서관에 얼마나 죽치고 있는지도 알 것 같다.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정적과 침묵이 지배한 장소이므로 수도원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의식 하지 않을 수 있었겠지.

『빵을 굽는 부뚜막에 불 피우는 건 힘드니까, 진짜 빵은 아니고 비슷하게 만드는 거야. 어렸을 때, 짐에서 흘러넘친 밀가루를 모아 상사의 난로에서 자주 만들어 먹었어.』
『아가씨의 입에는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쟈드가 빈정거리자, 클레어는 받아치듯 반쯤 내리감은 눈으로 바라본다.

『약속의 땅, 클루더로스를 나서는 우리에게 신의 가호가 있으리.』
『뭐?』

 쟈드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되물어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쟈드는 제대로 성전 같은 걸 읽은 적이 없어.』
『어머, 이거 실례.』
『뭐어?』

 약속의 땅 클루더로스. 그곳을 이교도에게 빼앗긴 것은 벌써 1,200여 년 전으로 아주 오래된 일이다. 그때 신의 어린 양들은 매우 당황해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느긋하게 빵을 발효시키지도 못하고, 그냥 밀가루를 물로 빚어 구운 것을 배와 헐렁한 주머니에 잔뜩 집어넣고 뛰쳐나갔다.
 클레어가 말한 것은 그 고사의 한 구절이다.
 수도원에선 그때의 고사를 본따,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이 현자의 빵을 먹는다.[각주:1] 클레어는 때에 따라서 성전을 인용하는 데, 책을 싫어해도 성전의 이야기라면 할지도 모른다. 성전주해서나 신학서는 이 근방의 주교님들보다 많이 읽지 않았을까.
 서가에서 보았던 성 안브로시우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문득 클레어가 말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버터와 소금이 있는 게 좋겠지.』

 클레어는 일어서더니 식당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망설이지 말고 일찍 말을 해볼걸, 이라며 후회했다.

『소금과 버터라…. 염장육도 꽤 괜찮지. 괜찮은 식사가 될 거 같군.』

 수도원에 납품되는 것이니, 도시에서 우리 같은 말단이 먹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이 밀가루도 제대로 발효시켜 장인들이 제대로 구우면 부드럽고 새하얀 빵이 될 것이다.
 나는 밀가루를 뭉치며 쟈드에게 말했다.

『그보다 쟈드. 클레어에게 사소한 것들로 화내게 하지 마. 이렇게 대접해주는 거 보면 사정이 있겠지.』

 물론 내가 책을 사들이거나,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방해가 되는 점도 없지 않다.

『뭐? 넌 아직 어리구나. 전혀 모르고 있어.』
『뭐, 뭐가.』

 혹시 속마음을 꿰뚫어 본 게 아니냐며 당황하자, 쟈드는 근심 없는 미소를 이쪽으로 보내왔다.

『미인은 웃을 때 보다 화낼 때가 매력적이라고. 눈빛이 오싹오싹 하잖아.』

 그러더니 이빨 사이로 으히히, 라는 웃음을 흘려보낸다.
 그 욕망에 대해 충실하고, 솔직하네, 라며 칭찬해줘야 할지 잠깐 고민을 했으나, 곧 바보 같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웃는 모습이 좋은 게 당연한 거잖아.』
『그래?』
『그래. 저렇게 꽁해있는데 도대체 어디가 귀여운…. 아.』

 말끝은 꽃잎이 되어 난로의 불빛이 닿지 않는 복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황한 쥐가 어둠 속에 서 있는 클레어의 발목을 피하고 도망친다.

『아, 아니, 그.』

 당황해버린 것은 오해살 만한 부분만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히 신경 안 써.』

 클레어가 말했다.

『너희 같은 천한 사람이 좋아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의 변명은, 거침없이 식당에 들어와 나무그릇이 바닥에 닿는 소리에 묻혔다.
 거기에는 충분한 양의 버터와 소금이 든 항아리가 있었다.

『꽁하고 귀염성 없어서 미안하네요.』
『읏. 쟈드으….』

 나는 쟈드를 향해 목 안쪽에서 저주를 짜내며 노려보았지만, 쟈드는 입을 막은 채 웃고 있었다. 클레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홱 돌려 앉았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을까 봐서, 나는 포기하고 식사 준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쟈드 녀석 언젠가 복수해주겠어, 라는 원망과 함께 버터와 소금을 섞은 밀가루를 납작한 냄비에 얇게 펴 바른 후 붙였다. 그리고 벽난로에 있는 숯불 위로 재를 뿌려 화력을 조절한 후 납작한 냄비를 올려두었다. 그 뒤엔 꼬챙이로 반죽에 생기는 거품을 터트리며 구워지는 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간단하네.』

 버터 때문인지 좋은 향기가 감돌기 시작한 무렵, 클레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불쑥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옛날에는 벽난로의 벽에 직접 붙여서 구웠었지.』

 옛날부터 빵을 구울 때 한 번도 도와준 적이 없는 쟈드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코를 문질렀다.

『사막의 은수자도 이렇게 했다는 걸 책에서 봤거든. 따라 해보니 의외로 잘 되더라고.』
『흠』

 어떤 책에서 봤니? 라는 질문을 기대했건만, 클레어는 쟈드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자그마한 어깨를 으쓱한 것뿐이었다.

『자, 나는 빵보다는 이쪽이니까. 좋은 포도주도 있고 말이야.』

 쟈드는 벽난로의 불을 보더니 부랴부랴 다른 냄비를 숯불 위에 올려둔다. 어른 두 사람이 들어가도 충분할 것 같이 큰 벽난로였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아직 여유가 있다.

『고기를 굽는 거야?』

 우리는 뭐든 만들어 먹으면 좋다고 생각했지만, 클레어의 말투에는 싫어함이 느껴졌다.

『육식하지 않는 거야? 납품되는 데도?』

 육식을 금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정이 어려운 수도원들이 주로 하는 것이다. 그랜든 수도원은 쟈드의 말처럼 납품 품목에 고기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절대로 금지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클레어의 마른 몸을 보고 떠올렸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고기가 너무 부담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나도 병으로 누워있을 때는 마늘과 고기 기름 타는 냄새는 질색이었으니까.

『그런 건 아냐. 알아서 먹어.』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일어서더니 어디론 가로 사라졌다. 쟈드는 클레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더니 나를 보고 고개를 으쓱했다.
 그리고 쟈드는 별다른 내색 없이 고기를 굽기 시작했고 지글지글, 기름이 구워지는 소리가 시작되자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식욕을 돋우는 향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때, 돌아온 클레어의 손에는 소금에 절인 청어 두 마리가 있다. 그리고 입에 꼬챙이가 꽂혀있는 그것을 말없이 벽난로 입구에 꽂았다.

『뭐야, 단순히 취향의 문제였던 거잖아. 진짜 귀족 아가씨답네!』

 쟈드가 그런 말을 했지만, 클레어는 무시했다.
 하지만 나는 쟈드의 말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 은수자의 초막을 찾은 세 명의 수도사 이야기?』

 그 순간 클레어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 조금은 먹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상태가 좋지 않으면 무리하지 마. 오래전 의사가 쓴 책에도 빵과 약간의 올리브유, 그리고 데워진 포도주만 먹는 편이 좋다고 쓰여 있었거든.』
『….』

 클레어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눈을 피하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녀석.』
『헉. 어, 어째서 그런….』
『흥.』

 거리를 지나가는 높디높은 마차의 좌석에서, 행인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귀족의 딸. 그 정도로 무뚝뚝한 옆모습이었지만 나는 화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클레어가 생선을 가져온 것에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저명한 은수자가 있는 사막의 암자로 찾아온 세 명의 수도사. 은수자는 손님을 대접하려고, 평소에는 계율 때문에 먹지 못하는 식재료를 사용해 대접했다.[각주:2] 하지만 세 명의 수도사 중 한사람이 계율에 따라야 합니다, 라는 말을 하곤 주머니에서 볶은 콩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남겨진 두 명의 수도사는 자신들도 계율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준비해준 음식을 먹을까를 고민했다. 그러자 저명한 은수자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계율은 사람을 바로잡기 위해 만든 것이지, 그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각주:3]
 잘 생각해보면 그 현자는 600여 년 전에 수도원을 처음 세운 현자[각주:4]였다…. 라는 이야기.
 클레어는 자신만 현자의 빵을 깨작깨작 먹고 있으면 우리가 불편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살벌한 눈빛에 무뚝뚝하지만, 속내는 상냥하고 괜찮은 아이다.
 그런 아이와 즐겁게 책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빵에 생긴 거품을 꾸물꾸물 터트린다.
 하지만 그런 걸 조금도 생각하지 않을 쟈드는 잘 구워진 염장육을 씹어먹더니 최상급 포도주를 입으로 부어 넣었다. 너무나 걱정이 없는 모습에 나는 오히려 감탄할 정도였다. 고민은 솟아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찾는 것이라는 말은 분명 사실인지도 모른다.
 나도 쟈드를 따라 칼로 고기를 썰며 기름의 달콤함에 몸을 맡겼다.
 한참을 맛있는 식사에 빠져있었는데 문득 뒤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조용한 식당뿐이었다. 과거 그곳을 떠들썩하게 만든 수도사들은 사라진, 무인(無人)의 공간이다.
 해도 완전히 저물어 기온이 떨어지고 있어서 자꾸 등에 냉기가 휘감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단순히 그 때문일까.
 그러나 식당의 모습에서 떠다니는 냉기가 시체의 차가운 손처럼 느껴져 나는 식사를 하는 중간중간 뒤쪽을 신경 쓰게 되었다.

『유령 같은 건 없어.』
『윽.』

 클레어의 지적에 움찔하고 만다.
 겁쟁이, 라는 말을 여자아이로부터 들었을 때 상처받지 않을 남자는 없다. 하지만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라고 클레어를 조금 원망했다.

『엄청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거든.』
『아.』

 그리고 그 한마디로 나를 바보 취급한 것 이외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

 뒤를 돌아보니 죽은 수도사가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에겐 무서운 일이겠지만, 클레어에겐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가워할 일로 몇 번이고 간절히 바란 모습인 것이다.

『상관없어. 이젠 포기했으니.』

 클레어는 납작한 냄비에서 꺼낸, 평평하고 쫀득쫀득한 무효모빵을 뜯더니 조금씩 입으로 가져갔다. 아무렇지 않게 빵을 씹어먹는 모습은 운명에 대한 쌓이고 쌓인 원한을 천천히 되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역병이었던…. 거야?』

 나는 조심조심 물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꼬마일 때의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내 얼굴을 때리려 주먹을 치켜들었…다는 것은 내 착각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내 앞에 높인 포도주를 가져갔을 뿐이었다.

『계집애니.』
『큿.』
『그건 나도 궁금한데.』
『….』

 쟈드가 나서자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식어서 쪼그라든 무효모빵처럼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계집애를 씨 없다[각주:5]고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전염병.』

 생각보다 호쾌하게 포도주를 들이켠 클레어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온 방랑 수도사가 앓던 병이었어.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아파하더니 사흘 만에 죽었지. 그리고 그때부터야. 하나둘 고열로 쓰러진 건. 검게 탄 화상을 입은 것처럼 죽어갔어.』
『그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으나, 흑사병[각주:6]이겠지.
 발병하면 열 명에 아홉은 죽었다는 절망적인 병.

『넌 괜찮았어?』

 쟈드의 질문에, 클레어는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난 피눈물을 흘렸지. 창백한 시체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거야.』

 비꼬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던 나는 염장육을 씹고 뜯으며 근심을 달랬다.

『사실은 나도 병에 걸렸었어. 2주 이상 고열에 시달렸고, 다 끝났어, 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살아남은 거야. 신앙심으로 따지면 아래 사람부터 걸리는 게 맞는데.』

 그러면서 클레어는 포도주를 든 병을 기울더니 그 안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거기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담긴 듯이, 뭔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고열이 내려간 후,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어. 수도원은 침묵의 규율이 있어서 항상 정적이었지만[각주:7], 그것은 정적과는 다른 고요함이었어. 여름은 끝나서 맞이하는, 청정하면서 살짝 더운 날. 계속 잠을 자서 그런지 세상이 이렇게 밝은 걸까, 라며 햇빛에 어지러워했던 걸 기억해.』

 클레어의 시선이 우리를 피했고 손에 있던 포도주병도 힘없이 바닥에 툭, 놓였다.

『아무도 없었어.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일어나지 못했어.』

 혹시 같은 일이 상회에 일어났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깼을 때 자신 이외의 모든 인간이 죽어있다. 친한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몸이 약한 사람도, 도움을 준 사람도 빠짐없이.

『간호를 받은 만큼 필사적으로 간호했어. 의학서도 종류별로 봤고. 하지만 허사였어. 죽음의 무도[각주:8], 그 말이 어울리는 광경이었어.』

 귀족, 동네 주민, 어린아이, 노인. 죽음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다가온다.[각주:9]

『소중한 것들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매일 이였어. 그거 알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병은 밤이 되면 사람을 괴롭혀. 어두워지면 어둠은 앓아누운 사람의 몸을 덮치는데, 그러면 가슴을 누르는 것처럼 신음이 그들의 입에서 새어 나와. 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어. 어둠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없애려고 양초에 불을 붙이고, 불이 꺼질 때까지 기도할 수 밖에 없었어. 그렇게 힘을 다해 기도해 쓰러져 잠들어 버리게 되고 눈을 뜨면 조용한 아침이 오는 거야. 적어도 죽음은 그들의 고통을 덜어줬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클레어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코를 훌쩍대는 소리를 냈다. 나는 가슴이 아팠지만, 위로의 손을 뻗어주는 것이 옳은가를 고민했다. 나는 그런 불행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잘 알 거 같다는 얼굴로 동정하는 건 실례가 아닐까? 이별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책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어느 것도 이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깨를 움츠리고 곧게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 클레어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순간, 쟈드가 일어섰다.
 그리고 클레어의 옆에 앉더니, 거칠게 그녀의 머리를 안았다.

『이, 이러지 마! 아무렇지 않게 만지지 마! 네가 뭘 안다고 이러는 거야!?』

 예상대로 클레어가 울음 섞인 고함을 치며 몸을 격렬하게 뒤틀었지만, 쟈드는 놓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어.』
『뭣….』

 클레어는 말문이 막힌 채 저항하는 것을 멈췄다.

『정말 싫은 놈도, 묘비 밑에 누워있으면 싸울 수가 없어. 언젠가 그 녀석을 두들겨 팰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힘든 일은 견딜 수 있잖아.』
『….』

 클레어는 쟈드를 멍한 얼굴로 쳐다본다.

『먼 바다에 나가는 선배 상인들에게 들은 이야기야. 살아서 돌아올지 모르는 출항 때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놈을 떠올려. 그러면 그 녀석이 편히 살고 있는데 내가 죽으면 억울하다나 뭐라나.』

 클레어의 머리를 어린 여자아이를 다루듯이 톡톡 두르린 쟈드는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나는 어지간한 일로 안 죽어. 정말 싫어하겠지만 한 달에 두 번은 반드시 이쪽으로 와준다고.』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쟈드.
 하지만 그걸 뒤집어보면.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면, 상대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뭐, 뭐라는 거야.』

 클레어는 힘없이 말하더니, 쟈드를 싫다는 듯 밀어냈다. 이번에는 쟈드도 무리하게 저항하지 않고 클레어를 놓아줬다. 하지만 쟈드도 웃고 있었고, 클레어는 수줍은 듯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모습에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문득 쟈드가 어른스럽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쟈드가 짐마차를 맡는 것은 키가 나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훌륭한 한 명의 남자가 되어 수만 권의 책을 읽은 나보다 세상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쟈드의 견실함에 나는 큰 꿈으로 맞섰다. 하지만 쟈드가 슬퍼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달래주는 모습에 남자로서 패배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뭐, 그런 대단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눈빛이 이렇게 살벌한 것 걸까나.』
『쓸데없는 참견이야!』

 쟈드의 농담에 클레어가 격하게 반발했지만, 진심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의 일로 마음을 허락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책만 잔뜩 읽은 멍청이에겐 끼어들 자리가 없는, 현실적인 남녀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건 어째서지? 그렇게 했다면 너의 괴로움도 조금은 줄었을 텐데.』

 능청스럽게 말을 건네는 쟈드였지만, 클레어도 망설였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게….』
『말하지 않으면 여기다 똥을 싸버릴 거야!』

 설사약을 담았다는 거짓말에 대한 복수.

『식당에서 그런 말 하지 마, 이 바보야!』

  쟈드는 즐겁다는 듯 깔깔 웃었고, 클레어는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그런 모습은 말장난을 주고받는 소꿉친구 같아 보였다.

『원장님께서 빨리 나가라고 하셨어.』
『그건….』

 쟈드가 갑자기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 모습을 본 클레어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원장님이 살아계셨을 때 거든.』
『아, 아니, 미안.』
『뭐야, 기분 나빠.』

 그러자 클레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그 미소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화난 얼굴보다 훨씬 좋다. 친근하면서도, 이지적인 누나 같은 상냥함이 담긴 미소에 그 자리가 빛난 것처럼 보였다.

『와, 처음으로 웃었네.』
『앗』
『귀여운 걸?』

 쟈드의 무심한 지적에, 클레어는 눈을 부릅뜨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곧바로 소라게가 몸을 감추듯, 금세 미소를 굳은 무표정 아래로 숨긴다.

『….』

 그리고 무서운 표정으로 쟈드를 노려본다.

『나는 그렇게 화내는 쪽을 좋아해.』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리자, 클레어는 도망갈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허둥지둥하더니 쟈드의 어깨를 화난 듯이 치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쟈드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어댔다.

『그래서, 원장님이 뭐라고 하셨어?』

 쟈드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기를 씹어 먹으면서 이야기를 독촉했다.
 클레어도 그 새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그런 능청맞은 모습을 무시하기로 한 것인지 별다른 반응 없이 말을 이어갔다.

『원장님께선 마지막까지 내 걱정을 해주신 자상한 분이셨어. 이곳이 전염병으로 황폐해지면 여러 가지 성가신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해 주셨지. 혼자 살아남으면 엉뚱한 오해를 불러온다고, 그러기 전에 빨리 나가라고 하셨어. 그렇지만 그렇게 못하겠는걸. 여기에는 모두가…. 잠들어 있으니까.』

 예전의 추억을 바라보고 있는지, 클레어의 초점이 사라졌다.

『하지만 계속 있을 생각은 아니지?』

 쟈드가 말했다. 분명 클레어는 1개월 만이라도 좋으니까 이곳의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다.

『글쎄, 사실 남아있고 싶지만, 현실적으론 무리니까.』
『왜? 음식은 남아돌고 있잖아?』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있는 게 아니야.』[각주:10]

 성전의 말을 인용하자 쟈드는 짜증 난 듯 턱을 당겼다.

『수도원은 고립된 섬이 아니니 분명 언젠간 들키겠지. 특히, 나는 원래 이곳에 무리해서 왔던 몸이니까.』
『그건 여자인데 성격이 더러워서 남자만 있는 수도원에 오게 됐다는 뜻인 거야?』
『때리고 싶지만…. 반쯤은 맞다고 해줄게.』

 쟈드가 순진한 미소를 짓자, 클레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 지었다.

『아버지께서 친했던 이곳의 원장님께, 자신이 모았던 책들과 함께 날 맡긴 거야.』
『앗』

 그 말을 듣고 나는 무심코 소리 질러버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당황했지만, 이때다 싶어서 물었다.

『그럼…. 그 도서관의 책이 클레어의?』

 그 물음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부.』

 그 말은, 역시 클레어를 설득하기만 하면 책을 살 수 있다. 그리고 클레어가 저 책들에 집착하지 않은 걸 보면 외로움이 책을 사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그 가능성에 떨림을 느끼고 있을 때, 쟈드가 말했다.

『하지만 여긴 여자는 못 들어오는 곳이잖아.』
『어떤 일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야.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고.』
『이유?』

 쟈드가 되묻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있던 영지는 산 너머에 이교도의 땅이 있었어.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전쟁이 빈번했던 탓에 영지에 있는 성과 도시의 저택을 오갔지. 하지만 3년 전, 아버지는 이교도와 큰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며 이런 준비 끝에 나를 마을의 저택에서 이곳으로 억지로 보내셨어. 아버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으니, 마을에 나 혼자 남겨두는 것은 불안하셨던 거야.』
『뭐, 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쁘니까. 아버지로서는 불안하신 게 당연하셨겠지.』

 턱에 손을 댄 쟈드는 클레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짜증 난다는 기색을 내보였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다.

『마을의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내가 휘둘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은 잘하네.』
『흥. 하지만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녀석들이 잔뜩 있다는 게 문제였던 거야. 특히 나는 외동딸이라 영지가 목적인 독신 귀족에게는 좋은 먹잇감인 거지.』

 그런 이야기는 자주 들었는데, 강제로 10대인 귀족의 어린 딸을 아내로 맞이한 60세의 원로 귀족의 이야기는 교회에서 가장 크게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1]

『만약 아버지에게 "일"이 생긴다면 나는 들판에 버려진 토끼가 되어버려. 그러면 옴이 바글대는 추악한 털로 뒤덮인 늑대의 먹이가 되는 거야. 이 세상에서 늑대는 늑대, 토끼는 토끼. 나는 권력 다툼의 도구가 되는 것이 질색이라 결국 이 석벽 안으로 들어왔어. 하지만 이곳이 전염병으로 힘들어할 때, 그 우려했던 "일"이 터져버린 거야.』

 쟈드가 보기 드물게 입을 닫고 있다. 물론 나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특별히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어제 날씨를 이야기하듯 담담히 말했다.

『아버님은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셨어. 나를 여기에 두고 말이야. 뭐, 그런 걸 대비해 이 수도원에 20년 치의 기부를 해오셨기에 곧바로 곤란하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는데.』

 쟈드가 지시를 받고 하고 있는 그 일.

『하지만 석벽 밖에서는 무자비하게 일들이 진행되었던 모양이야. 아버님은 훌륭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사생아도 없었어. 어머니는 나를 낳고 바로 돌아가셨고, 혈족도 모두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죽었어.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가문의 피를 이은 나는 석벽 안에서 겉으로는 영원한 신앙생활을 위해 들어간 것으로 되었지. 우리 영지가 이교도와의 전쟁 최전선이었던 것도 있고, 아무도 없는 땅에서는 있을 수 없었으니까. 우리 가문의 영지는 왕에게 빌붙어 아첨하던 다른 귀족이 가로챈 듯해. 즉,』

 클레어가 농담하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어. 지켜줄 사람도 없고.』

 세상의 눈을 막는, 높은 돌담에 둘러싸인 이곳이 클레어의 은신처인 것이다.

『다, 다른 수도원에 가는 방법은?』

 나는 무심결에 입을 열었지만 클레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대할 때처럼 부드럽게 나무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전염병으로 이곳이 힘들어했을 때도, 원장님께서는 다른 수도원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 그것과 같은 이유로 말이지.』

 무슨 말이지? 라며 당황하자 쟈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약점을 보이면 난처하다는 건가. 지위와 권력이 있는 자들은 성직자가 가진 것에 음험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니까?』
『여기 원장님께선 예외였지만, 그 말이 맞아. 도움을 구걸한다면 순식간에 먹혀버린다고 하셨어.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만이라도 완쾌해서 수도원을 재건하려 하셨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병마와 싸우셨지만…. 결국 쓸모없는 나만 남아버렸어.』

 클레어는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친척도, 재산도 없는 나 같은 여자아이가 다른 수도원으로 간다는 건 현실적으론 불가능해.』
『책이 있잖아? 그렇다면 이 녀석에게 팔아버려.』

 쟈드의 철들지 않음과 무례함도 가끔은 쓸모 있다. 나는 속으로 환호했다.
 기대 가득한 눈으로 클레어를 보자, 클레어는 무효모빵을 뜯으며 말했다.

『수도원에 거주하는 이는 어떤 것도 소유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어. 그 도서관의 장서도 마찬가지. 아까는 절대 팔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실은 팔 수 없다는 쪽에 가까워.』
『응? 무슨 말이야? 네가 있던 가문의 것이잖아?』
『물론 심정적으로는 지금도 그 책들은 아버님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돌아가신 원장님께서도 언젠가 모든 일이 정리되면 돌려준다는 약속을 하셨을 거야. 하지만 그건 원장님과의 개인적인 약속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론 기부 된 것으로 되어있어. 장서도, 20년간의 물자 납품도, 양피지 위의 모든 물건이 수도원의 것. 내가 멋대로 처분을 하거나, 그것들을 가지고 다른 수도원으로 가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큰 문제가 될 거야.』[각주:12]
『그렇지만 비난하는 사람들은 전부 묘비 아래에 있잖아.』

 쟈드의 말투에 클레어는 완전히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해를 못 한거 같네. 아까도 말했지만, 수도원은 고립된 섬이 아니야. 수도원끼리는 수직적이며, 부모 자식 같은 관계로 이루어 져 있어서 상하관계가 엄격해.[각주:13] 아마 기부나 시주 등에 큰돈이 얽혀있기 때문이겠지. 실제로 쟈드가 가져오는 것들은 사치품들뿐이잖아?』
『아아…. 확실히 그렇군. 게다가 20년 치잖아.』

 엄청 큰 금액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 수도원의 엄마 수도원은 이곳 수도원의 재산도 파악하고 있을 거야. 재산 목록이나, 소유권을 기록한 양피지 다발은 어머니 수도원에 있을 테니. 그걸 보며 날마다 즐거운 돈 계산을 하고 있겠지. 빌어먹을 상인새끼처럼.』

 귀여운 얼굴을 한 여자아이가, 기쁘다는 말투로 빌어먹을 새끼라고 말한다.
 상냥하게 웃는 것만이 여자의 매력이 아니다, 라는 쟈드의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곳의 재산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그렇게 한다는 건 수도원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뜻이 되니까.』

 나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고, 쟈드도 그런 듯 보였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피 외투를 휘날리며, 보검을 허리에 차고 말을 탄 사람들이 펜과 권위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한다고 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벽난로 속, 장작 타는 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그러니까 이곳에 역병이 돌았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엄마 수도원에서 사람이 올 테고 금녀의 장소에 내가 있어선 안 되니 쫓겨날 거야. 기부도 거액이 이루어진 상황이고, 우리 가문은 이미 영지도 사라진 지 오래니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다음에 오시는 수도원 원장님이 재산이 없는 날 이곳에 머물게 해줄 마음 착하고 좋은 분이길 바라는 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길 기도하는 것만큼 무모해. 기껏해야 첩이 되는 것이 고작이려나. 다행히 얼굴은 이쁘니 말이지?』

 흠칫 놀라며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가족이 없고, 상회가 키워준 몸이기 때문에 만약 상회가 쫓아낸다면 길거리를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클레어 같은 운명은 아니다.
 아무리 강인한 클레어라고 해도, 이 무자비한 세상 속에 맨 몸으로 뛰어든다면 버거울 것이다.

『그래서 뭐랬더라. 책의 매입이었나?』

 갑자기 이야기를 건네와,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건 내가 없어진 후, 엄마 수도원 원장님께 말해. 심술부리는 게 아니라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야.』
『으, 응』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가문의 장서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건가, 라고.
 클레어는 장서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 장서는 사라진 가족의 유품 아닌가.
 다만 그 의문을 말하기 전, 클레어가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잠깐만이라도 이곳의 일을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계속 비밀로 한다는 게 무리라는 건 알아. 다만 잠깐이면 되니까….』

 언제까지? 라고 묻지 않았다. 그 질문에 희망이 있는 답을 바랄 순 없었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돈이 필요했던 꼬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망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려 듯이. 하지만 수도원을 나오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친 풍랑이 몰아치는 세계다. 그곳에서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빛나는 금화뿐이다.
 그래서 클레어가 좀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꺼낸 이유가 뭔지 알 수 있다. 순순히 인정하진 않겠지만, 단순히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웃을 수만은 없다. 클레어는 착한 데다 보호자도 없이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바깥으로 내던져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도시에 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농담을 건네던 쟈드도 진지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나, 난…. 아니, 우리는 상관없어!』

 살짝 후회가 들긴 했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는 나를 바라보더니 힘없이 미소 지었다.
 다만 그것은 허황된 위안의 말을 건네는 것이 몸에 밴 귀족의 미소였다.

『뭐, 나도 상관없어.』

 쟈드는 말을 하면서도 싫은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근데,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결정한 게 있어?』

 클레어는 시선을 보냈지만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겠지.』
『저기, 우리 상회라면 1명 정도는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와 쟈드, 두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네.』
『하, 하지만….』

 라며 당황하는 클레어를 보며 쟈드가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필보다는 클레어 쪽이 쓸만해 보이거든.』
『뭐야 그게!』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지만, 자신 스스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우리 상회는 항상 일손이 부족해. 까다로운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거야.』
『가, 각오는 하고 있어.』

 쟈드의 농담에 까다로운 일이 어떤 게 있을지,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손을 보면 어떤 힘든 일이라도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만.』

 클레어는 당황해하며 손을 무릎 아래로 넣어 숨겼다. 손이 거칠어 있는 것은, 어떤 작업으로 혹사당했기 때문일까. 마지막으로 원장이 사망한 것이 두 달 전이라면, 쭉 혼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무릎 아래에 손을 숨긴 클레어는 살짝 주눅 든 여자아이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 클레어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구나….』

 역병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갔지만, 그럼에도 즐거운 일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나와 쟈드는 클레어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척해줄 배려심은 있다.
 그리고 클레어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다. 자신도 언젠가 이런 식으로 서적상이 되기를 포기하고 안개 속에서 현실로 돌아올 날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그런데 상회로 돌아가 클레어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둘째치고,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 그 녀석이야.』
『그 녀석?』

 반문한 것은 클레어였다. 쟈드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이단심문관 말이야. 저 녀석이 은폐에 협력해 주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그럼 죽여버릴까? 라는 뉘앙스의 말을 꺼냈는데, 그에 대한 대답에 모두가 놀랐다.

『저도 찬성합니다.』
『우왓!?』

 쟈드가 가장 놀라며 펄쩍 뛰었다. 속으로 불온한 생각을 들켰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코레드 아브레아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연히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미끈미끈한 독특한 걸음걸이로 들어와서는 아이처럼 쭈그리고 앉아 구운 염장육 한 조각을 들었다. 어떻게 할지 지켜보자 크게 벌린 입으로 던져 넣었다.

『흠흠. 맛있네요. 더 없나요?』
『구우면 됩니다….』

 아브레아의 앞에서 쟈드는 높임말을 사용했다. 평범하지 않다, 는 건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거 같다.

『한 조각 더 먹고 싶네요.』
『….』

 시키는 대로 고기를 다시 굽는 쟈드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아브레아는 클레어를 보았다.

『당신은 현명합니다. 어리석은 계집이었다면 둘둘 묶어서 당장 내쫓았겠지만…. 당신의 아버지께서 일부러 저런 장서들을 골라 남길 정도였으니까요.』
『네? 골랐다?』

 의아하다는 듯 되물은 클레어였다.

『집에 있던 모든 장서를 가져온 것입니다만….』
『아, 그래요?』

 아브레아는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흠, 하는 소리와 함께 턱에 손을 댔다.

『그렇다는 건…. 아니, 제가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겠죠. 적어도 당신의 아버지께서 지녔던 학식은 믿을 수 있습니다. 전쟁 같은 무의미한 일로 잃는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될 겁니다.』

 아브레아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일방통행이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저는 그저 이곳에 종교재판을 위해 온 게 아니며, 무엇보다 이곳의 장서는 훌륭합니다. 수도원의 재산이 이러쿵저러쿵 같은 이야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제가 이곳의 책을 다 읽을 때 까지는 은폐에 가담해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게 이 사람답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죠.』
 
 아브레아가 말했다.

『장서 목록은 없나요?』

 이 녀석은 진짜다, 라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생각한 것이다.





 은폐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그동안 들키지 않았으니, 똑같이 행동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방문객인데, 수도원엔 가끔 여행 중인 수도사 등이 찾아오는데 클레어는 꼬마의 모습으로 물리치고 있었다. 성무 중이다, 단식기간이다, 같은 변명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책 매입도 가능성의 싹이 완전히 잘려나간 게 아니다. 지금부터 이 수도원을 오는 사람들과 협상하기 나름으로, 즉, 다시 한번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거기다 이렇게 멋진 장서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난 뭐라도 할 것이다.
 지금 곧장 달라붙어 닥치는 대로 읽고 싶은 책을 앞에 둔 채 나는 목줄이 묶여있는 개처럼 멈춰 서 있다.

『그럼, 오늘 중으로 목록을 만들어 주세요.』

 식당에서 아브레아가 온 것은 아무래도 엿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를 부르기 위해서인 거 같다.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이곳에 아브레아의 몸종으로 온 것이란 걸 것을 떠올렸다.

『전, 전부 말입니까?』
『네. 물론이죠. 누락 없이. 그럼 부탁합니다.』

 지금은 이미 해가 저물었다던가,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거나, 도구가 갖추어 져 있다거나 하는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교황청 도서관에 던져넣었을 때도 이랬었지, 라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브레아는 실컷 떠들더니 달빛이 닿는 서가의 구석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곳은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을 것이다.[각주:14]

『가능할까?』


 그렇게 말을 건네온 것은 촛불을 켠 촛대를 든 클레어였다.
 도우러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뭘 하려는 지 지켜보러 온 느낌이다. 책에 대한 애착도 없고, 장서에 대한 권리도 수도원의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역시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전부 다 합치면 2천 권 정도 될 텐데.』

 클레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을 누비는 지델 상회의 주인인 지델님의 장서보다도 100권 정도가 더 많다. 물론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을 이용한다면 더 모을 수도 있겠지만, 붓쵸 대장에게 찾아오는 상당한 애서가 중에서도 천 권 가량을 보유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2천 권이란, 현재의 수도원과 대성당이 종교적 열의 때문에 모으는 규모와 같기에 쉽게 볼 수 있는 양이 아니리라.
 더욱 대단한 건, 단순히 봐도 중복되는 책이 없다는 것이다. 돈과 권력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성 들여 장서가와 연락을 취해 사람을 보내고, 수십 년간 열리지 않은 수도원과 교회의 서고를 열어젖혀 귀중한 서적의 사본 복사 등을 통해 꾸준히 모으고 나가야만 이 정도 규모로 모을 수 있을 것이다.[각주:15]
 클레어의 아버지는 도대체 어떤 열의를 가지고 이만큼 책을 모은 걸까.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결코 이루지 못할 일이다.
 나는 그것도 마음에 걸리지만 일단 눈앞에 일이 있었다.
 그것이 아브레아가 강요한 엉뚱한 일이지만, 책에 관한 일이라 오히려 흥분됐다.

『종이와 잉크가 있을까.』
『있지만…. 진짜 하려고?』

 걱정해주는 듯한 모습에 순간 기뻤지만 클레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리더니 재빨리 걸어나간다.
 사실 기대는 안 했어, 라며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클레어는 필경실 옷장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건네주었다.

『잉크와 펜은 여기에.』
『고, 고마워. 대금은 저 사람에게 달아두면 되는 걸까….』
『수도원의 소유물이지만 종이의 장수까진 파악하지 않으니 상관없어. 그것보다.』

 말을 잠시 끊은 클레어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째려보며 말했다.

『책은 더럽히지 마. 일단 우리 가문의 것이니까.』

 읽는 것엔 관심이 없어도, 수집 자체를 즐기는 장서가도 있다.
 게다가 그 점에 대해서 만큼은 나도 자신 있다.

『걱정하지 마.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거니까. 절대로 더럽히지 않아.』

 가슴을 펴며 책임지겠다고 말했지만, 클레어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책이 좋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쟈드와 대화를 나눌 때 보여준 친근함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짝에 쓸모도 없는 데.』

 책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한마디를 듣고 말았다.
 다만 서적상이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를, 클레어의 한마디가 절실히 말해준 것이다.
 나는 살짝 울컥한 감정을 억누르며, 클레어에게 "잘자" 한마디를 남기고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나는 늘어선 책을 앞에 두고, 중얼거렸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많은 책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책을 쓰는 것은 힘들고, 후대에 전하는 것은 더 힘들다. 고생해서 베껴도 종이는 200년만 지나면 너덜너덜해진다. 양피지라면 500년까지 버티고 약간의 불길에도 견디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너무 비싼데다 그 양피지조차 쥐와 곰팡이, 그리고 물에는 약하다. 그리고 2,000년 전의 포도와 올리브 시대에 쓰인 책쯤 되면 너무나도 형편없는 식물로 만든 두루마리, 또는 점토판에 새겨져있다.[각주:16]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각을 가지고, 책들을 후세에 전했다. 그것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몇 번이나 그냥 잊혔다가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새롭게 필사된 덕분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우연의 사슬이 한 번이라도 끊어지면 그 책은 영원히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나는 순수한 의문이 들었다.
 왜 그렇게 귀중한 책을 통한 장사가 성립되지 않는 거지? 왜 사람들은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을까? 여기에 있는 것들은 기적의 덩어리라고 부를 만한 것들인데.
 일생을 바쳐 신에게 질문하던 성 안브로시우스는 아니지만, 답을 해주지 않는 책은 어디까지나 잉크 얼룩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잉크 얼룩에 일희일비하는 애서가는, 혹시 요염한 마법에 매료돼버린 이교도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해됩니다.』

 라며 불쑥 나를 밀친 검은 그림자가 서가 앞에 섰다.
 망설임과 주저라는 단어는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 아브레아다.

『흠. 이 책도…. 아니. 으음.』

 중얼중얼하며 책을 꺼내 펼쳐 넘기기 시작했다.

『아, 저.』

 무심코 말을 걸자, 처음으로 아브레아는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목록은 다되셨습니까?』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무의미한 독촉이나 불쾌한 한마디가 아니다. 열흘 만에 만나 일의 진행 상황이 어떤지를 듣는 느낌이다.
 이 사람은 분명 자신과는 다른 세계를 살아왔다.

『아니, 아직입니다만….』
『그런가요. 부디 신속하게 부탁드립니다. 책이 이만큼이나 있기 때문에 분담하지 않으면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네요.』

 무슨 조사를 하는 걸까,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고 있자 종종걸음으로 책을 내거나 집어넣고 있다. 내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아브레아는 흥미로운 책을 발견한 건지 숨이 막힐 듯 신음을 내고 행동을 멈춘 채, 책에 눈을 떨어트리며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붓쵸 대장에게 매달렸을 때처럼― 그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뭡니까?』

 매서운 눈은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지만, 그래서 질문을 입에 올렸다.

『당신은, 왜 책을 읽습니까?』

 그렇게 진지한 모습을 하면서까지.
 나는 그동안 이것을 물어볼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 질문은 항상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몫이었다.
 물론 나는 좋아하니까, 라며 가슴을 펴고 대답했지만, 이곳에 온 뒤론 책에 대한 열정이 꺾일 뿐이었다.
 아브레아라면 이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해줄 거라 생각했다.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워줄, 강력하고, 빛나는 신의 계시 같은 한마디를 말해줄 것이라고.

『왜 책을 읽는 걸까.』

 아브레아는 나를 보면서 질문을 반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탐구, 네요.』

 나는 예상하지도 못한 단어에 눈을 끔벅였다.

『탐, 구?』
『이 세상에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브레아가 아이와 같은 미소로 말했다.

『생각이 났습니다. 당신은 옛날 우즈워스의 「황금의 나라」를 다 읽고 절망했었죠. 이야기가 끝나버렸다고.』
『윽』

 먼 옛날의 것을 헤집자, 나는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저도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책을 다 읽는 것이 아까워서 재밌어 보이는 책은 펼쳐 보는 것조차 하지 않았죠. 시작하지 않으면 끝나는 일이 없다, 고. 진지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아브레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압도되면서도 얼굴에 제멋대로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날, 책에는 그 끝 너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흑의를 두른 이단심문관은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엔 본당 내부의 서가가 있었다.

『소리, 말입니다. 들리지 않나요?』
『소…. 리?』

 아브레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후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그 소리에 이끌려 온 것입니다.』

 저자의 대부분은 이미 죽었다. 설마 망령이라든지 그런 걸 말하는 걸까.
 내가 마른 침을 삼키며 아브레아를 바라보자, 그 얼굴엔 문득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책에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를 잘 모으면 아름다운 합창이 됩니다. 그 합창을 듣는 걸 좋아합니다. 다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애서가 대부분은 고작 “이 세상에 어떤 책이 있을까” 정도의 호기심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이 장서의 주인은 책의 의미를 제법 이해하고 있던 것 같아요.』

 빙 둘러보던 아브레아는 큰 소리로 웃는다.

『저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라는 것이겠죠. 신을 기리는 노래가 있는지 하면, 아기를 어르는 노래도 있잖아요? 다만 어떤 이유라도 탐구의 정신이라는 것이 없다면 사람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여전히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말투라 내용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알 거 같은 느낌도 든다.
 탐구의 정신.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도, 오락거리이기 때문도 아니다.
 쟈드에게 바보처럼 당하고, 클레어에게 냉대를 당해 쓸쓸해하던, ―서적상이 되고자 한― 그 열정과 같은 무언가를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혹시 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곳에서 해야 할 질문이 떠올랐다.

『그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서적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손님이 없기 때문이고, 손님이 없는 것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 나의 질문에 아브레아는 나를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한 것이다.

『또 생각이 났네요. 당신이군요. 서적상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하자, 나는 당황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브레아의 입이 초승달 모양이 되며 히죽 웃는다.
 정말 섬뜩한 미소였지만, 순간 나의 어깨를 툭툭 친 그 손은 묘하게 따듯했다.

『엄청 비웃었습니다. 저는 저 이상으로 책의 세계를 탐구하는 인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갑자기 뒤쪽 어딘가에서 비스듬히 다가온 누군가에게 따라 잡혔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

 칭찬하는 거야?
 내가 어안이 벙벙해 하자 아브레아는 사레가 들릴 정도로 웃었다. 아무래도 진심으로 즐거운 거 같다.

『우후훗. 그러한 탐구 방법도 있다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저는 책을 찾는 자유를 얻기 위해 흑의를 입었지만, 분명 그렇네요. 책을 찾아내고 사본을 만들어 팔아넘기면, 장서를 무한히 늘려나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게다가 자금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고. 탐구의 정신에 참으로 충실합니다. 모험엔 돈이 드니까요.』

 역시 아브레아는 신앙 때문에 이단심문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이단심문관은 사상적으로 수상한 책을 불에 지피거나, 책의 주인을 찢어 죽이는, 애서가의 적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배신자라도 되겠다는, 아브레아의 자세가 제법 그럴싸해 웃게 되지만 온몸에 가득한 들뜬 기분은 그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서적상이 되고 싶다는 것을 칭찬해 주었다. 게다가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실로 정확하게 말해준 것이다.
 나는 아브레아의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텼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란 건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서적상 같은 건 성립하지 않는다는 거죠.』

 손을 잡아 하늘로 끌어당겨 줄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태연히 하늘을 올라가던 도중에 손을 놓아버렸다.
 아아, 아브레아는 이런 녀석이었구나, 라며 나는 눈물이 쏙 들어간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란으로 인해 소란스러우니까요. 책의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겠죠. 대신 하루하루가 시끄럽습니다. 대다수 사람이 책을 읽지 않아요.』

 아브레아처럼 책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더라도, 역시 그 결론이 옳은 것 같다.
 나는 신기할 정도로 낙담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니까.
 그런 가르침을, 아브레아가 전달해 준 것은 오히려 다행인 건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포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은, 쓸모없으니까요….』

 그래도 무의식중에 그 한마디가 나온 것은 클레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이 필요로 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원망이기도 하다.
 그 순간이었다. 아브레아가 미소를 거두고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쓸모가 없다?』

 너무나 진지하게 나를 바라봐, 당황해버렸다. 책벌레인 아브레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싸움을 거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말을? 당신입니까?』
『아, 아뇨. 제, 제가 아니라 그….』

 횡설수설 하는 나에게, 아브레아는 대뜸 얼굴을 들이밀며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에 쓰려 했습니까?』
『네?』

 그 눈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아브레아는 말했다. 독서의 이유를.
 탐구심.
 아브레아는 책을 읽고, 페이지를 넘기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책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어떤 일에 쓰려 했는지 알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 그게….』

 그러나 나는 말문이 막혔다.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고 시큰둥하게 말했었다. 클레어의 진짜 속마음을 알지 못했고, 어째서 세상 많은 사람이 책을 쓸모없다고 간주했는지도 몰랐다.
 당황하고 있자 아브레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에게 들이밀었던 얼굴을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서적상이 되고 싶은 게 아닌가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전달하는 것이 장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면 그것을 왜 필요로 하는지, 필요하지 않은지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는 아브레아의 말에 나는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아브레아는 갑자기 꿈에서 깬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헛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빨리 목록을 작성해 주세요. 저는 전부 읽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만, 시간이 없습니다. 부탁합니다!』

 일방적으로 그런 말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한마디였다.
 내가 이 도서관에 매입하기 위해 오게 된 것을 연극이라고 느낀 것은 어째서지?
 그것은 사들이더라도 팔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서적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금의 세계엔, 책을 찾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책에 관심 없다는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가끔 추악한 글이 쓰여 있다는 소문이 돌지만, 쟈드가 떠들어 대던 이야기들이 전부다.
 하지만 장사의 기본은 바로 아브레아가 말했던 것이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팔리는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갑자기 내 눈앞에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지 물어온 적이 있을까?
 나는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그리고 서적상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나를 자책할 때 "사람 중 책을 사는 사람은 몇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이며 원인이 아니다.
 책 같은 건 쓸모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겐 아브레아 처럼 물었어야 했다.
 그럼 어떤 도움이 필요한 거냐고.
 그리고 답변을 받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책에 담겨있으며, 책에 언급되지 않은 게 있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으니까.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질문하기.
 그것이야말로 탐구의 정신이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도서관에서 뜨거운 다짐을 했다.
 서적상의 길은 있다.
 그 길은 내가, 이 손으로 열어젖힐 것이다.





 아브레아의 말을 계기로 자신이 나아갈 일이 보였다. 나는 밤이 새도록 열중하고 작업했다. 책의 목록을 만드는 일은 이른바, 상품 목록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천장의 채광창엔 해가 보이진 않았지만, 어둠이 줄어든 것을 보고 아침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뺨을 닦은 손을 보자 잉크 때문에 새카맸다.
 목록을 만드는 일은 3분의 1가량 진행되었다. 훌륭한 책들뿐이었지만, 귀족이 수집하고 있던 것 치고는 기묘한 책 또한 많았다. 다양한 분야의 책이 있었지만 힘들진 않았다. 다양한 이야기가 쓰인 책들을 볼 때마다 "책은 도움이 되지 않아."라며 트집 잡는 손님에게 "그럼 이 책은 어떠신지요."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 고객은 기가 센 귀족 출신 소녀님이시다.
 밤샘 작업의 피로와 새벽의 차고 밝은 공기를 가지고 설레는 마음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콧김을 내뿜으며 책을 책꽂이에 꽂았다.
 상회의 기준으로 말하면 완전한 새벽인 이 시간에 도서관 문을 열고 거침없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필! 있냐! 피…. 어? 뭐야. 밤새 성실히 일하고 있던 거였냐.』

 도서관은 평온함과 지혜의 장소라는 걸 쟈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새하얀 숨을 몰아쉬며, 나만큼 활력 넘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말이지. 상회에서 그렇게 일하면 순식간에 높은 자리까지 갈 텐데 말이야. 뭐, 클레어가 무효모빵을 구웠어. 가자.』

 쟈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손을 잡아채 질질 끌고 나간다. 밤새도록 선 채로 글자를 쫓고 있던 나는 머리가 펄펄 끓고 있었지만, 체력이 떨어져 휘청휘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항도 했지만 결국 포기한 채 끌려갔다.
 그리고 서재를 빠져나와 회랑에 있는 방문자 명단이 놓인 책상 앞을 지나, 악마의 석상이 내려다보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 있던 것은 박명(薄明)의 하늘 아래 자리 잡은 짐마차가 있었고 클레어가 김이 나는 보따리를 마부석에 싣고 있었다.

『구운 빵을 포장해 놓아둔 거야.』
『오, 고마워.』

 쟈드는 가볍게 감사를 표하고, 마부석으로 뛰어올랐다.
 클레어는 짐마차에서 몇 걸음 떨어져, 춥다는 듯 양손을 입에 댄다.

『읏챠. 이봐. 필.』

 쟈드는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타.』

 고삐를 잡고 당장에라도 말을 몰아갈 기세였다.
 마치 내가 옆자리에 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악마의 석상 아래에 서 있었다.
 쟈드가 마침내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 멍하니 있지마. 돌아가자고.』

 그 짜증나는 표정에서 어떤 조급함이 느껴졌다.
 과거에 읽은 영웅담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영웅이 죽은 자의 나라에서 돌아올 때 안내인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며 당부했었다.[각주:17] 쟈드의 지금 모습은 바로 그 안내인의 모습과 같았다.
 밤을 새워버려 휘청거리고 있는 나는 얼굴과 손, 옷 등에는 잉크가 튀어나온 피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어 옅은 어둠 속에 서 있는 만신창이의 시체처럼 보일지 모른다. 게다가 나의 뒤에 있는 것은 깊은 안개가 감도는 서적의 세계다. 쟈드는 그곳에 나를 데리고 온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갈림길에 서 있는지 겨우 깨달았다.
 쟈드는 나를 현실의 세계로 데려오려 하고 있다.

『가자고, 필!』

 쟈드가 다그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것을 깨달은 나는 침을 삼키며 턱을 당긴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이었다. 쟈드는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6개의 계단을 두 발로 뛰어 올라 나의 팔을 붙잡더니 억지로 당겼다. 굉장한 힘이기에 저항 따윈 할 수가 없다.

『돌아가야 해.』

 그 짧은 한마디에 나 역시 한마디로 답했다.

『일이야.』

 바짝 마른 목이 따끔거렸고, 쟈드도 그 아픔을 이해한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네가 하는 것은 일이 아니야.』

 단호한 어조.

『꿈에서 깨, 필. 네가 하는 건 일이 아니야. 아브레아에게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어. 몸이 좋지 않다거나, 다른 핑계로 그만두면 되는 거야. 우선 네 얼굴을 봐. 죽은 사람 같아. 그리고 네 처지를 생각해 봐. 죽은 사람과 다름없잖아. 이대로 상회에 가서 말하면 돼. "저와 맞는 일을 가르쳐 주세요"라고. 그러면 넌 다시금 태어나는 거야. 상사의 일원이 되는 거라고. 그리고 "오오. 주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라고 감사하면 그걸로 다 끝나! 알겠어?』
『하지만….』
『넌 돌아가야 한다고!』

 쟈드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진지한 얼굴에서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울음이 나올 만큼 고마움을 느꼈다.
 쟈드는 정말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쟈드의 손을 잡아 반대 방향으로 옮겼다.

『쟈드.』

 나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목소리가 침착했고, 쟈넬은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납게 날뛰는 맹수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죽어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표정이었다.

『서적상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떻게! 나는 붓쵸 대장에게 부탁받았어. 네가 또 그 이단심문관의 감언이설에 휘말리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야. 너는 또다시 그런 낭패를 겪고 싶은 거야? 게다가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가 아니야. 또다시 그런 일에 휘말리면…!』
『아냐. 아브레아와는 관계없어. 다른 일이야.』

 쟈드의 우락부락한 손을 붙잡고 있어도 단순한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힘 이외의 것이 있다.

『다른 일?』

 나는 쟈드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조금도 기죽지 않은 모습에, 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말이야, 필. 네가 서적상의 꿈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클레어가 우리 상회에 온다고 했을 때, 넌 그때도 지금처럼 식충이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쫓겨나 버릴걸?』

 나는 숨을 들이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밤을 새운 탓에 잘 돌지 않는 머리를 힘껏 회전시키며, 나는 당장에라도 사라지려 하는 빛을 잡으려 하고 있다. 천하의 아브레아 조차 “책으로는 장사를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물론 그 말은 옳은 것이겠지. 
 그러지만 적어도, 적어도 한 조각의 꿈이라도 쥘 수 있다면, 그것을 가슴에 안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서적상이 되고 싶어.』
『뭐?』

 쟈드는 당혹스러운 듯 미간에 주름을 지었으나, 내가 붙잡은 손을 들어 올리는 걸 거부하진 않았다.

『그리고 너는 이곳으로 돌아올 거잖아?』

 그 물음에 쟈드는 답변을 주저했다.

『으, 응. 그런데….』
『그땐, 얌전히 돌아갈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울음을 터트리는 것도, 땅바닥에 누운 채 아등바등 발버둥 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쟈드에게 약속을 했다.
 상인을 목표로 하는 쟈드에게, 서적상으로써.

『….』

 쟈드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다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치고 머리를 박박 긁었다.

『정말이야?』

 기가 막힌 형이 동생에게 묻는 듯이.

『정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깐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쟈드는 시선을 둘 곳이 없는 듯 먼 곳을 쳐다보다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크게 기지개를 켜며 이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뾰로통하게 말했다.

『바보 같아.』

 그리고 발길을 돌려 재빨리 마차의 마부석으로 향했다.

『너는 바보다.』

 쟈드는 고삐를 쥐며 말했다.

『그런 바보는 머리라도 좀 식히라고』
『그럼….』
『흥.』

 쟈드는 콧방귀를 끼더니, 나와 상대방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그래서, 다음에 올 때까지 이 바보를 잠깐 지켜줘.』
『뭐? 내가?』

 클레어가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저 이단심문관에게 속지 않은가만 보면 돼. 이 녀석은 자는 동안 덮칠 용기는 없으니까.』

 나를 바라보지 않고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가리키던 쟈드는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클레어가 자는 사이 덮친다면 오히려 이쪽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부탁해.』
『나는 상관없….』
『그럼 또 올게.』

 찰싹, 하고 말 궁둥이를 때리는 소리가 나더니 짐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쟈드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중정의 안뜰을 가로지르겠다. 문 앞에 내려 문의 걸쇠를 치워 열어젖힌 후 마차를 지나 보내고 나서 다시 문을 닫았다.
 나와 클레어는 그 일련의 행위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이 닫힌 순간 우르르하고 밤샘의 피로가 나를 덮쳤다.
 쟈드를 잘 설득했다.
 이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래서?』

 추위를 참기 위해서인지, 불안함 때문인지, 클레어는 갑갑할 정도로 강한 팔짱을 낀 채 나를 반쯤 감은 눈으로 째려본다.

『여기에 남아서 뭘 할 생각이지? 상인 놀이?』

 쟈드에겐 마음을 열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그렇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발악하며 손을 뻗은 희망의 빛은 바로 클레어의 이야기 속에 있었다.
 클레어는 분명히 말했다. 책은 쓸모가 없다고.
 그 클레어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찾아낼 수 있다면, 서적상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장사의 기본이다.
 물론 시대적으로 책의 매매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건 이해된다. 전쟁으로 인해 인건비와 원자재비가 폭등한 상황에서 사본의 제작비용이 무서울 정도로 비싼 것을 고려하면, 장사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나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길 저편에 비치는 불빛을 향해 반드시 걸어갈 거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레어의 언짢은 듯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일단 이쪽의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책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더라도 제대로 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밤샘 작업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다.

『이, 일단 잘래….』

 내가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벽난로에 아직 불이 피워져 있어. 맘대로 해.』
『고마…. 워』

 나는 있는 힘을 짜내 그렇게 대답했고 무릎이 무너질 듯하면서 돌계단을 내려가 도서관 반대편 건물로 향했다. 클레어를 스쳐 지나가자 갑자기 손을 뻗어왔다.

『잠깐. 이거.』
『아.』

 깜빡 잊고 있었지만, 나의 한 손엔 작성 도중이었던 목록 한 페이지가 쥐어져 있다.

『열심히 만든 거잖아?』

 클레어는 싫은 얼굴을 하곤 잔뜩 구겨진 종이를 바라보며 구김을 펴고 있다. 이렇게 관심을 보여주자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어떤 책이든 간에, 필시 귀중한 책인 거니까.』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움츠리고 있다. 다만 클레어는 도서관의 돌계단을 오르며 악마의 조각상 밑에서 뒤돌아서 이렇게 말했다.

『서고 내부를 더럽히지 않았겠지.』

 옷 전체에 잉크 얼룩이 져 있었지만 나는 그 말에 힘차게 답했다.

『채, 책은 더럽히지 않았어. 책은 소중하고 귀중한 거니까.』

 클레어는 의심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다 휙 하고 방향을 돌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해진 새벽하늘 아래 우두커니 서 있다.
 잠시 후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고 아직 구운 빵 냄새가 남아있는 벽난로 앞에 쓰러졌다.
 꿈을 꿀 만큼의 여유도 없이, 그대로 의식을 잃은 것이었다.






  1. 유대인들의 광복절인 유월절에 먹는 누룩이 없는 또는 발효되지 않은 빵 또는 크래커인 무교병을 말한다. 노예로 부려지던 유대인들이 이집트 제국을 탈출했는데, 급히 탈출하는 바람에 밀가루를 발효시킬 만한 시간이 없었고, 대신 누룩을 넣지 않은 반죽으로 빵을 구워먹었는데 이 빵이 바로 무교병이다. [본문으로]
  2. 고대·중세 시대에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관습인 “접대의 관습(The Laws of Hospitality)”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3. 예수가가 말씀하시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가복음 2:25~28. [본문으로]
  4. 여기서 현자는 사막에 거주하고 있으며 수도원을 처음 세웠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초기 기독교 수도원(monastery)의 형태가 이집트 사막지역에서 탄생한 것을 묘사한 것이다. [본문으로]
  5. 원본엔 무효모빵을 “씨 없는 빵(種なしパン)”이라고 표기했는데 이를 이용한 언어유희. [본문으로]
  6.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의해 발병하는 급성 열성 전염병. 현재까지 발견된 전염병중 가장 높은 치사율(2017년 기준, 치사율 10%)을 자랑한다. 대(大) 유행한 적이 몇 번 있으나 그 중 14세기 중세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를 강타해 7,500만~2억의 인구가 사망한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본문으로]
  7. 중세 초, 세속화된 교회를 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일었는데 이중 910년 프랑스 클루니에서 시작되어 11세기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 클루니 수도원 운동의 규율을 묘사한 것이다. 클루니 수도원 운동에서는 폭음과 폭식을 줄이고, 침묵을 큰 덕으로 여겼다. [본문으로]
  8. Dance of Death. 중세 말기에 유행한, 죽음의 보편성에 대한 알레고리를 묘사하는 미술 장르이다. 죽음의 무도는 시체들 또는 의인화된 죽음이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을 대표하는 산 자들, 즉 교황·황제·국왕·어린이·노동자 등과 만나거나, 또는 무덤 주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생명이 얼마나 허무한지, 현세의 삶의 영광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는 이에게 일깨우려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9. 앞서 언급했던 죽음의 무도와 마찬가지로 중세에 널리 퍼졌던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라는 신념을 말한다. 이는 13세기 이전부터 중세 사회에 널리 퍼졌던 “세 명의 산 자와 세 명의 죽은 자”라는 설화로도 알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며 다양한 버전이 나오나 전설의 초기 버전은 다음과 같다. 세 명의 귀족이 말을 타고 숲을 지나다가 살아있는 해골 셋을 만났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해골들은 가르침을 원하는 귀족들에게 “우리도 과거에는 당신들과 같았고, 당신들도 머지않아 우리처럼 될 것이오(Quod fuimus estis, quod sumus eritis)”라는 말을 남긴다. 이는 신분을 고하고 결국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본문으로]
  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 마가복음 4:4 [본문으로]
  11. 이 일화는 앞서 언급했던 귀족이자 교황의 최측근이던 포조가 1436년 56세의 나이에 18세의 부온델몬티와 혼인을 했는데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비웃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본문으로]
  12. 중세시대 클루니 수도원 소속의 수도사는 재산 소유가 금지되었으나 수도원은 재산 및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몇몇 대형 수도원들은 왕족, 귀족들의 후원과, 와인, 양모 산업으로 큰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13. 11세기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수도원인 클뤼니 수도원은 지역별로 엄마(母) 수도원이 존재했고 클뤼니 수도원들은 자신을 관리하는 엄마 수도원에 복종해야 했다. [본문으로]
  14. 장미의 이름》에서도 등장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발언을 참고한 것이다.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angulo cum libro(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 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본문으로]
  15. 이는 르네상스의 유명 가문 중 하나였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家)를 참고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고전(古典)을 사모으기 위해 “책 사냥꾼”을 고용, 유럽 전역에 있던 책들을 수집했다. 팔지 않겠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필경사를 파견해 그들이 가진 책을 필사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이후 메디치가는 이 자신들이 모은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 “산 로렌초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이후 1524년 클레멘스 7세의 지시로 이 도서들을 보관토록할 도서관을 건설하게 되었고, 미켈란젤로가 로렌치아나 도서관 설계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본문으로]
  16. 식물로 만든 두루마리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점토판은 고대 소아시아에서 사용한 점토판을 말한다. [본문으로]
  17. 고대 그리스 신화 중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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