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제4막

(◉◞⊖◟◉) 2017. 6. 3. 22:44


을 뜨자 식당 안에 햇살이 바스라져 들어왔다. 햇살의 기울기를 보자 낮인 듯 했다.
 난로 속의 잉걸불[각주:1]은 굉장히 따듯했다. 계속 이렇게 빈둥거리고 싶다는 유혹이 강렬했지만 나에겐 해야할 일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줘 일어나보니 머리맡에 식기와 작은 항아리가 놓여있다. 클레어가 구워준 듯한 무효모빵과 포도주였다.
 
『….』

 뾰족한 말투와 행동을 보여주지만 역시 혈통이 좋아서 인지 여성스러움이 느껴진다. 클레어가 곤란해 하고 있다면 서적상 흉내와는 상관없이 힘이 되어주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기엔 충분하다.
 물론 정말 그렇게 해줄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은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방대한 책의 지식이 있는, 이른바 수천 년을 거쳐 온 현자들의 조언이 있다.
 두려움은 없다.
 
『좋아.』

 기합을 넣고 식당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내리쬐는 밝은 빛에 눈이 아프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온화한 햇살이 있는 이 세상에는 어떤 불행도 없다는 듯 했다.
 따듯한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
 그리고 큰 걸음으로 식당 건너편에 있는 도서관의 계단을 두 단씩 뛰어올랐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지적이고 당당한 분위기가 변함없이 있었다.
 우선 필경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클레어. 있어?』

 문 너머로 말을 걸었지만 반응이 없다. 다시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부재중인지, 아니면 있는데 없는 척 하는 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도서관 입구에서 요란스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움츠리고 있자 거침없는 발소리와 함께 서고의 문이 열렸고, 발소리는 그 속으로 사라졌다.
 우왓, 도둑 아니면 엄마 수도원에서 사람이 온 거야? 라는 생각이 들어, 필경실 앞 복도를 따라가 서고의 입구에 얼굴을 살짝 내민 순간이었다.
 안에서 클레어가 뛰어나오더니 문을 닫지도 않고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걸음걸이엔 잔뜩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걸음걸이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신경 쓰인 것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입술을 깨문 얼굴엔 화가 잔뜩 나있었지만 눈매를 닦고 있던 것.
 다른 하나는 큼지막한 책을 안고 있었던 것이었다.

『울어…. 게다가 책을 가지고?』

 어떤 상황이 펼쳐진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다짜고짜 쫓아가는 것도 망설여졌다. 꼼꼼할 것으로 보이는 클레어가 문도 잠그지 않은 채 나갔으니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인 후, 서고로 들어갔다.
 지식의 요새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책꽂이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다 뭔가를 알아챘다.
 서고의 중간에 위치한 서가 앞바닥에 책 몇 권이 꺼내져 있다.
 이 부근의 서가는 이미 목록을 작성해 뒀기 때문에 어떤 책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게다가 귀족의 장서로는 다소 이상한 것이기 때문에,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뇌리에 남아있다.
 나는 바닥에 놓인 책이 꽂혀있던 서가로 돌아가 빈틈을 찾아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여기에 어떤 책이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 물레방아 책?』

 기억해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은 물레방아에 대한 책이 두 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으로는 농업에 관한 책이 줄지어 있었는데 "귀족답지 않다."라고 생각했었다.

『맞아.』

 자신의 눈앞에 놓여 있는 서가에 있는 책들은 사색이나 의논을 다룬 책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오히려 실용적인 도움을 줄 만한 책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약초 책이나 의학 서적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물레방아를 다룬 책도 어디에 있지 대충 알고 있다.
 물레방아를 만들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고 들었고, 유지도 힘들어서 대개 귀족과 교회가 짓고 사용료를 징수하고 있다. 농업지침서도, 대(大) 영지의 귀족은 자신의 영지 수익을 늘리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광산의 채굴과 제련에 대한 책들도 있는데 보통 광산을 소유한 이들은 귀족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수중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재봉을 다룬 책과 요리를 다룬 책도 있다.
 잔뜩 수염을 기르고, 외투를 휘날리며, 말에 걸쳐진 검을 들고 이교도와 싸우는 영주의 장서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가죽을 햇볕에 말리는 법, 실을 뽑는 법, 칼을 가는 방법, 또한 목공을 위한 지침서가 있는 이유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다시 둘러보자 이 서가 귀퉁이에 있는 작은 부분에 있는 책들만으로도 마을 하나를 만들 기세였다.
 무척이나 호기심이 많아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귀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책을 가까이 두었다는 것은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열린 사상의 소유자라고 상상할 수 있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는 서고 주인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다.
 나는 잠시 후 아브레아가 말했던 책의 「목소리」는 아마 이런 걸 말한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목록을 만들 때도 살짝 느꼈던 것이지만, 이곳에는 질서가 있다.
 무작위로 닥치는 대로 모았다는 것이 아닌, 어떤 의도가 느껴졌다.
 까다로운 사상서의 종류도 긍정적인 것들인데, 성 안브로시우스의 책이 바로 그 예다.
 신에게 얼마나 묻더라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것은 사후의 즐거움으로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라는 일견 어리석은 내용이 담긴 책을 즐겁게 읽고, 다음날의 활력을 채울 것 같은 인물상이 훤히 보였다.
 책의 표지를 바라보며 어렴풋이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곰곰이 하다 번쩍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은 그보다 클레어가 먼저다.

『으―.』

 책을 앞에 두면 생각이 정지해 버리는 자기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크고 깊은 호흡을 한다.
 클레어가 물레방아를 다룬 책을 꺼낸 것은 틀림없다.
 게다가 문을 닫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화를 내며 울고 있었다.
 그 클레어의 모습과 들고 간 책과의 연관성이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
 다만 클레어에겐 미안하지만, 책을 안고 밖으로 뛰어나갔다는 건 서적상의 길의 첫걸음을 시작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발길을 돌려 서고를 뒤로하고 클레어를 찾기로 했다.





 수도원은 나름 큰 편이었지만, 돌담에 둘러싸여 있고 주위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는 황야이기에 틀림없이 부지 안에 있을 것이다. 거기다 물레방아를 다룬 책을 안고 있었으니 물이 있는 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 둘러보다 지금은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 옆의 메마른 수로를 찾아냈다.
 아름다운 돌조각을 배치한 수로는 허리 정도까지 물이 차게 되어 있고 밭 옆을 지나가고 있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물을 떠 작물에 뿌렸을 것이다.
 수로를 따라 수도원의 북쪽으로 가자 조석으로 만든 저수지가 보였다.
 이곳은 수로와 달리 지금도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고 안쪽에서는 물이 솟아나고 있다. 수로가 마른 것은 단순한 이유였는데, 나무판자가 물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저수지 옆에는 작은 청동으로 만든 성인상(聖人狀)이 추운 계절임에도 반라의 모습으로 서 있다.
 아마 물과 관련된 기적을 일으킨 성인일 것이다.
 어쩌면 원래 이곳에 수도원을 만든 계기가 이 저수지와 성인 때문일 수도 있다.
 저수지에서는 밭으로 향한 수로와는 다른 수로가 1개 더 뻗어 있었는데 그 수로를 따라 걷자 군데군데 수로 옆에 이끼와 수초가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엔 누군가가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클레어가 청소한 것이다. 클레어의 거친 손을 생각하면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쟈드의 말이 맞다.
 일이 고되다고 곧바로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을 아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수로를 따라 걸어갔다.
 식당이 있는 큰 건물을 지나자 어른 키를 훌쩍 넘어서는 키의 물레방아가 있는 2층 높이의 방앗간이 있다.
 하지만 수레바퀴는 움직임을 멈춘 지가 오래된 건지 꼭대기 주변에는 새가 둥지를 틀고 있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기울어 있는 듯했다.

『이걸 고치려고 했던 걸까….』

 중얼거림과 동시에 방앗간 쪽에서 나무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해 물레방아 방앗간으로 뛰어가서 문을 열자 그곳엔 끔찍한 광경이 보였다.

『크흣…. 뭐야 이거?』

 자욱이 피어오르는 먼지 때문에 콜록대며 안을 둘러보니 혼란스러운 장면이 시야에 들어온다.
 물레방아 방앗간은 2층 높이였지만 단층인 널찍한 장소였는데 바닥엔 물건이 어질러 져 있다. 그 사이에서 구르고 있는 목재는 새것도, 낡고 오래된 것도 있었으며 나무 톱이 잔뜩 쌓여 만들어진 산이 있다.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는지 중간 정도에 부러진 톱이 나무에 낀 채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
 거기에 한 아름 정도 돼 보이는 둥근 모양의 돌 두 개가 나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무참히 꺾여 있는 빗장 같은 막대가 있다. 추측건대 막대기를 지렛대로 삼아 돌을 움직이려다 훌륭하게 부러졌을 것이다.
 널려있는 돌은 맷돌이었다.

『클레어?』

 가라앉은 먼지를 손으로 털며 그 이름을 불러본다. 바닥은 난장판이었지만 물레방아 방앗간 안에는 물레방아를 움직여 맷돌을 돌게 하는 기구뿐이다. 다른 쪽엔 벽에 수리용 자재가 산을 이루고 있었지만, 사람이 숨어 있을 장소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까의 소리는 자재가 쓰러진 것 뿐이냐고 생각했을 때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들고 숨을 들이마시었다.

『크, 클레어?』
『힉! 아, 안돼! 보지맛!』

 물레방아 방앗간은 2층 높이의 천장까지 이어져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 중앙에 위치한 큰 대들보에 매달려 있는 클레어가 있다.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새끼 고양이처럼 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대들보에 걸쳐있는 밧줄처럼 얇은 다리가 허벅지까지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지 말라고!』
『그, 그렇지만』

 나는 말문이 막혔으나, 문득 깨달았다. 옆엔 위에서 떨어트린 것 같은 책과 사다리가 떨어져 있다. 아까의 소리는 이것이었다. 나는 사다리를 들어 올려 대들보에 댔다.

『자, 붙잡고 있으니까 빨리 내려와!』
『으으…. 저, 절대로 위를 올려다 보지마!』

 클레어는 그런 말을 하며 겨우 사다리를 붙잡고 내려왔다.
 클레어는 예상대로 살짝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시무룩해 있었다.
 그리고 옷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내더니 옷의 주름을 폈고, 눈가를 비비며 떨어져 있던 책을 주웠다.

『언제까지 있을 셈이야.』
『뭐?』
『빨리 도서관으로 돌아가』

 감사하는 모습이 하나도 비치지 않았다. 클레어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허벅지를 드러내 보였다는 부끄럽다는 단순한 이유와 함께 보 위에 올라갔던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클레어를 바라보자 책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다.

『저기….』

 나는 소심하게 말했다.

『도와줄까?』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클레어가 남겨진 곳을 보면 분명 물레방아와 맷돌을 연결하는 부분을 고치려 했던 것 같다.

『도와준다니, 뭘 말이야.』

 뾰로통해진 얼굴로 클레어가 그렇게 말한다. 화가 났다거나, 싫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인 여자아이가 토라진 듯한 모습이다.

『물레방아를 고치고 있는 거 아니야?』

 밖에 있는 물레방아엔 새 둥지까지 만들어져 있다.

『그건 물레방아를 다룬 책이고.』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생각을 해도 물레방아 수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원래는 서적상 견습생으로써 클레어가 필요로 하는 책을 찾아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클레어는 싫은 듯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고쳐…. 줄 거야?』

 쟈드라면 가슴을 펴며 맡겨줘, 라고 대답했겠지만 나는 쟈드와 달리 정직한 성격이다.

『아니.』
『뭐어?』

 기막혀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클레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책이 있으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해.』

 책은 지식을 남겨 전하는 것이고, 서적상은 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곁으로 책을 전해주는 거니까.

『힘은 없지만 혼자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거든…. 게다가 사다리가 또다시 떨어져도 도와줄 수 있잖아.』

 그 말에는 악의가 없었지만, 클레어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앙다물었기 때문에 실언했다는 걸 알아챘다.
 클레어는 손에 있는 책을 보더니 괴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들어 올리자 두려움과 함께 싫다는 듯 이야기했다.

『도와줘.』

 물론이지, 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클레어는 한마디를 재빨리 덧붙였다.

『도와줘서, 고마워.』

 역시 좋은 아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클레어는 엉망진창인 물레방앗간 안에서 짤막하게 말했다.

『물레방아를 움직이게 하고 싶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왜?"라는 의문이었다.

『밀이라도 빻으려고? 그렇지만 상회의 납입품들은 모두 빻아서 가져오잖아.』
『그게 아니라….』

 클레어는 더듬었다.
 하지만 곧바로 뭔가를 체념한 듯,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단지 물레방아를 움직이게 하고 싶은 것뿐이야. 이 물레방아는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새 둥지가 생길 정도니.』

 클레어가 노려보기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움직이게 하고 싶어. 여기를 나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이전 수도원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으니까. 여기저기 망가지고 부서진 채 나간다는 건 우리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는 거거든.』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레방앗간이 아수라장이 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기분은 알겠는데…. 저 부러진 톱이라든지, 뒤집힌 맷돌들은 뭐야?』

 내가 그렇게 묻자 클레어는 움찔하더니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했다.

『수리…. 하려고….』

 더 망가트린 거구나.
 그 모습에 처음으로 클레어가 동갑내기 여자아이라고 느꼈다.
 게다가 이 아수라장이 된 물레방앗간 내부를 보면 수리를 시작한 것이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 하지만 책엔 구조가 다른 물레방아들만 실려있어서 모르겠단 말이야. 어떻게든 닮은 걸 찾아서 고치려고 했던 건데….』
『좀 보여줘 봐.』

 내가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는 머뭇거리다 마지 못해 책을 건네주었다.
 머뭇거린 것은 그 책을 내가 단번에 이해한다면 굴욕이다,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책을 쟈드가 이해하면 역시 화병이 나겠지.

『아무리 봐도 그림이 이상해.』

 클레어가 불만스러운 듯 말한다. 철학서나 시편의 삽화와는 달리 큼지막한 그림이 많이 있으며, 다양한 물레방아와 무너졌을 때 사용해야 할 부품의 형상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거침없이 페이지를 넘긴 책을 정반대로 뒤집어 보자 이해가 되었다.

『이건 가로로 두는 물레방아의 책이야.』
『뭐?』
『물레방아엔 가로로 두는 것과 세로로 두는 것이 있어.』

 클레어는 물레방아와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가로로 두는 물레방아는 물레방아의 회전이 그대로 맷돌을 회전시켜서 부품도 적게 들어서 선호돼. 하지만 맷돌의 회전이 빠르지 않아. 그래서 효율이 좋은 세로로 두는 물레방아가 만들어졌는데 이쪽은 들어가는 부품이 많아. 세로 방향으로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가로로 회전하는 맷돌을 돌려야 하니까 필요한 부품이 늘 수밖에 없거든. 그러면 물레방아를 지지하는 토대도 같이 복잡해져.』

 눈을 휘둥그레 뜬 클레어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물었다.

『어, 어째서 그런 걸 아는 거야?』
『읽었던 다른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거든. 하지만 그 책엔 물레방아를 설명한 다음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바라면 어려움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니 욕심을 부렸다면 회개하라….“ 고. 설화도 있어. 욕심 많은 영주가 좁은 강에 물레방아를 건설했는데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물레방아에 막힌 강이 결국 범람해 성까지 잠겼고 성인(聖人)의 중보기도[각주:2]로 살아난 이야기 같은 거 말이야. 하여튼 물레방아 자체에 관한 책을 처음 읽는 거지만 나름대로 알고 있던 게 있었어.』

 나는 말을 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역시나 마지막까지 가로로 두는 물레방아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세로로 두는 물레방아밖에 보지 않았다면 잘못된 방향으로 그려진 물레방아 그림이라고 생각했어도 이해가 된다.

『세로로 두는 물레방아를 그린 다른 책이 있을지도 몰라. 잠깐 가지러 갈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클레어에게 책을 돌려준 후 도서관까지 뛰었다. 서가엔 역시 세로로 두는 물레방아의 책이 있다. 저자의 이름도 같았다.
 책의 구조도 앞의 책과 같았고 온갖 종류의 수차 그림과 그 구조가 적혀 있다. 교각 아래에 배를 2척 띄워 사이에 만든 물레방아 같은 것도 있다. 물의 수량이 일정해 변함없이 수차를 돌릴 수 있다니, “우와” 라는 감탄이 나왔다. 사실 물레방아는 강이 범람하면 물레방아가 물에 잠겨 돌아가지 않고, 수량이 줄어 물레방아 부분에 물이 닿지 않으면 역시 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책은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읽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왜 이 책으론 안 된다고 생각한 거야?』

 물레방앗간에 돌아온 후 그렇게 묻자 클레어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거랑 같은 물레방아의 그림이 없어서….』

 클레어를 대답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그 시선을 쫓자, 거기에는 클레어가 남긴 수많은 실패의 흔적이 있었다.

『그래서…. 같은 모양을 한 것이라면 움직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클레어는 억울함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으로 양손에 쥔 밧줄을 꽉 쥐었다.
 그것을 본 나는 살짝 당황했다.

『똑같은 모양의 수차는 드물다고 생각되는데?』
『뭐?』

 클레어가 고개를 들더니 이쪽을 보았다.

『기도랑 같은 거야. 어느 나라의 언어로 기도를 하든, 신에게는 반드시 전해질 테니.』
『….』
『혹은 어떤 언어는 신께 기도해도 전해지지 않을지도 몰라. 둘 중 하나인 거지.』

 농담하듯 말하자 클레어는 의표를 찔린 듯 웃었고, 곧바로 당황한 듯 눈썹을 끌어올렸다.

『여긴 수도원이거든.』
『미안.』

 사과는 했지만, 클레어는 이런 농담에 웃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러니까 음…. 이 책에도 있네. 물레방아에서 중요한 것은 회전하는 부품을 어떻게 맷돌에 연결하냐는 거야. 여기 물레방아는 맷돌과 어떻게 연결된 걸까.』

 나는 책을 손에 들고 물레방아의 기구 부분을 여러 각도로 바라보았다. 마치 거미줄처럼 목재가 어지러이 얽혀있었고, 그 안에는 원형의 큰 톱니바퀴와 지지대가 쓰러져 있다.

『이건 너무 복잡해.』

 클레어가 불쑥 말했다.

『이렇게 복잡한 삽화는 어디에도 없었어. 그래서 그림과 비슷하게 만들면 움직이지 않을까 해서….』

 톱으로 자르거나, 도끼로 부수거나, 맷돌을 뒤집은 것도 그 때문일까.
 나는 물레방아와 그것이 이어지는 기구를 대충 본 후 어깨를 으쓱했다.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톱니바퀴 같은 걸 지지해주는 지지대 때문이야. 움직이는 방식은 여기에 없어.』
『뭐?』
『그림에서는 그런 내용이 모두 생략되어 있어. 분명 그런 것까지 그리면 책이 잉크로 가득 차 새까맣게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야. 거기다 바닥의 기울기 같은 외적 요인에 따라 지탱하는 방법도 변할 테고. 그래서 그림은 중요한 것만 그려져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말하기가 곤란한데….』

 나는 뒤돌아 클레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고칠 수가 없어.』

 클레어의 머리카락이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쭈뼛 섰다.

『어, 없어? 고칠 수 없다니. 이봐.』

 다가온다.
 하지만 클레어는 뭔가를 짐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마 울면서 도서관과 이곳을 왕복했던 것은 이럴 것이라는 예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레방아의 세로회전을 가로회전으로 변환하기 위한 톱니바퀴가 저건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큼지막한 기둥 2개와 그 너머에 나와 쟈드가 함께 뒹굴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둥근 목조 톱니바퀴가 있다.

『저 톱니바퀴를 지탱하는 지지대가 중간에 박혀있어.』

 손가락을 그 지지대를 따라 움직이자, 클레어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이 지지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저 대들보야.』

 클레어가 기어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한 대들목의 바로 옆에 있는 대들보였다.

『저 대들보를 받치는 버팀목이 뚝 잘려서 기울어있어. 그 때문에 지지대도 어긋나 있고 톱니바퀴도 이상한 방향으로 기울어져서, 물레방아의 회전을 전달하는 축들이 땅에 닿아있어. 그렇게 되면 당연히 물레방아에 연결되는 축도 기울어지니까….』

 시선이 물레방아로 향한다.

『부러지진 않았지만 휘어져 버린 거지. 그 때문에 물레방아가 돌지 않게 된 거 같아.』

 클레어는 표정을 잃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어떡하면 좋아?』
『움직이기만 하게 하려면, 휘어진 물레방아 축을 빼면 되겠지.』
『그, 그렇다면.』
『하지만, 나…. 아니, 나와 클레어밖에 없잖아.』

 아브레아가 도와줘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축의 두께는 클레어의 허리와 비슷하다. 그런 통나무를 어떻게 빼낼 거지?
 게다가 그걸 빼기 위해서는 기울어져 있는 톱니바퀴도 빼내야 하고 그것을 빼내기 위해서는 기울어져 있는 지지대도 고쳐야 하고 지지대를 고치기 위해서는….

『힘 좀 쓰는 어른이 몇 명 필요하고, 끌어올리기 위한 밧줄 같은 것도 필요해.』
『무, 물레방아에 이어진 축을 잘라내는 건?』

 대담한 방안이다. 확실히 수리가 불가능하다면 그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맷돌을 포기하면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나는 자재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구는?』

 톱은 부러져있고, 벽에 비스듬히 세워진 도끼는 우리가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그리고 물레방아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야.』

 왜냐하면 축이 휘어지게 된 것은 클레어가 생각 없이 기둥을 잘라내려 한 탓이지만, 그 이전부터 물레방아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물레방아가 회전하지 않는 것은, 결국 물레방아를 멈추게 한 다른 요인들도 있기 때문이거든. 물레방아와 그것을 지탱하는 토대 어딘가에 뭔가가 끼어 있다든지, 나무가 썩어서 부러져 있다든지, 금속으로 고정된 부분이 녹슨 탓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있어.』

 나는 거기까지 말을 한 후 한숨을 내 쉬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우리가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클레어의 탓이 아니야, 라고 뒤돌아서 말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클레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우, 울지마.』
『울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파르르 떨며 손등과 소매로 계속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훔친다.
 나라는 사람은, 눈앞에서 여자아이가 울고 있는 이 사태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렸다. 쟈드라면 대담하게 저 어깨를 끌어안고, 속물답지만 마음을 울리는 말 한마디를 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손에 든 책에 그려진 구조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어떻게 할 수 없을까 고민했다.
 결론은 역시 무리라는 것이다.
 반대로 클레어가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레방아와 이어지는 축이 휘어버리고, 물레방아를 지탱하고 있는 토대에 알 수 없는 힘이 가해지고 있다. 그것 때문에 토대의 나무가 몇 개 부러져 물레방아를 지탱하지 못한 것이다. 밖에서 봤을 때 물레방아에 신경이 쓰였던 것은 단순히 눈에 거슬려서가 아니었다.
 축이 지탱하지 않은 물레방아는 수로의 바닥에 닿아 수로에 끼워진 모습으로 유지된 것이다.
 그렇다는 건 어떻게든 발버둥 쳐도 우리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클레어에게 전달하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다.
 여하튼 내내 서 있는 클레어는 간신히 울음을 멈추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분명 물레방아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탓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바라보고만 있자, 괴로웠다.

『저, 저기, 클레어』

 내가 불러도 클레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물레방아는 항상 수리가 필요한 물건이니까, 언젠간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와. 그것이 우연히 지금이었다는 것 뿐이야.』

 클레어는 고개를 들며 얼굴을 닦은 소매 틈으로 눈을 살짝 드러냈다. 사람을 노려보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을 만큼 예리했던 눈은, 버려진 강아지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뿐만이…. 아냐.』

 고개를 들고 흔드는 바람에 떨어진 눈물방울의 소리, 라고 생각들 정도로 가녀린 목소리였다.

『다른 일도…. 잘 풀리지…. 않아서』

 말을 하며 클레어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당황해 이렇게 말했다.

『아, 아아! 일단 밖에 나가 좀 쉬자. 여긴 먼지로 가득해.』

 먼지가 가득한 곳에서 울고 있기 때문에 얼굴은 온통 눈물 자국투성이다. 클레어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화가 치밀어 그 손을 잡고 물레방앗간에서 끌어냈다.
 나는 대담한 나 자신에게 살짝 놀랬지만, 지금 클레어는 클레어가 아니다.
 물레방앗간의 옆에 있으면 다시 울 것 같아 밭이 있는 곳까지 끌고 갔다.
 옛 현자가 남긴 말이 있다.
 슬픔을 잊으려면 그 원인에서 멀리 벗어나라.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얼굴 닦을 걸 가져올게. 어딨어? 알려줘.』

 클레어는 투신자살이라도 생각하듯이 물이 마른 수로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 지었다.

『없어.』
『어?』
『천 같은 건, 없어.』

 나를 바라보는 클레어의 눈은 마치 용서를 구하는 듯했다.

『모두의 몸을 감싸주는 데 필요해서…. 전부 다 써버렸어.』

 병으로 죽은 수도사들을 천으로 감싸며 묘지에 묻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말을 듣자 식당의 테이블에도 천이 걸쳐지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잠깐만 기다려. 일단 얼굴만이라도 씻고 있어.』

 나는 말을 한 후 도서관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상사에서 운반해온 짐을 뒤져 열매가 담긴, 아마포로 만든 마대를 꺼내서 담겨있던 나무 열매를 대충 옆에 비어있는 나무상자에 털어 넣었다. 향신료는 아니었지만, 수도원에 필요한 짐들이 담겨 있는 천이어서 인지 막 짜낸 듯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나는 이음매를 이빨로 물어뜯어 한 장의 천으로 만든 후 클레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클레어는 수로 속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당부한 대로 세수를 한 듯했다.
 다만 그 꼴은 마치 비를 맞고 쩔쩔매는 듯한 모습이다.

『이걸 써.』
『…. 어디서?』
『여기에 납품 되는 짐에서.』

 아직 눈물이 눈가에 남아있는 클레어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얼굴을 닦더니, 이내 싹싹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든 클레어는 클레어다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천도 안 되었어.』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닦은 후 천을 바라보던 클레어가 말했다.

『아마[각주:3]는 성전에도 나오는 식물[각주:4]이기 때문에 수도원에서도 길렀고, 그걸로 실을 짜는 의식이 있었어. 그래서 천이 없다면 실을 잣고 천을 만들면 될 거로 생각했지. 실제로 직접 천을 만들어 내는 사람을 본 적도 있고.』
『책도 도서관에 있었으니까.』

 내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책에는 방법들이 다 쓰여 있었으니까. 어느 지방의 아마라면 이런 방법이 좋다, 라는 것까지 말이야. 하지만….』
『안됐다?』

 필경실에 있던 풀 덩어리가 떠올랐다.

『줄기에서 실의 재료가 나온다는 건 거짓말이야. 물에 담가두면 흩어지기만 하고 실의 원료가 나온다고 쓰여 있었는데, 물에 담가도 풀은 그대로였어. 줄기를 두드려서 실을 뽑는 방법도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심한 냄새가 나는 가늘고 으스러진 줄기가 될 뿐이었지.』

 클레어는 또다시 울상이 되었지만, 이번엔 울지 않았다.

『거기다 주변의 많은 물건이 망가졌어. 톱이라든지, 바늘이라든지, 아니 쇠로 된 건 전부 녹슬거나 부러졌어. 도구를 고치려고 해도 그 도구가 고장 났어. 믿어지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몰랐어.』

 마을엔 어째서 그렇게 많은 장인이 있냐는 물음. 모든 것은 금방 고장 나지만, 직공이라면 금방 고쳐낸다. 그 순환 덕에 마을은 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책이 있었어.』
『어?』
『쇠는 녹여서 거푸집에 넣으면 그 모양으로 만들어진다고 쓰여있었어. 용광로를 만드는 방법도. 그래서 밭에 구멍을 파서 하라는 대로 했어.』

 도서관엔 제련을 다룬 책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결국 쇠는 불에 타버릴 뿐이었어. 풀무? 라는 것도 만들어봤어. 가죽 주머니에 공기를 담아 내보내면 불을 뜨겁게 한다고 되어 있었거든. 포도주가 담겨있던 가죽 주머니에 공기를 담아 내보내 봤지만, 모두 거짓말이었어. 불을 뜨겁게 해주다고? 책에 쓰여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단순한 가죽 주머니를 가지고, 그 입구를 통해 공기를 내보내고 화력을 높이려 고군분투하고 있는 클레어를 상상했다. 본인은 필사적이었겠지만 불쌍할 정도로 우스워 보였다.
 아니, 클레어는 책을 읽고 이해한 범위 내에서 실행하려 했을 뿐이다. 진짜 풀무를 본 적도 없었겠지. 물론 나도 붓쵸 대장의 공방 근처에서 다른 장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고 풀무가 일반적인 가죽 주머니와는 다르다는 정도만 알지, 그 구조는 모르지만.
 필경실에 있던 도구들은 그런 일 때문에 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밖에 있을 때도, 의자가 망가지거나 접시가 깨지거나, 부서지는 것들이 있었어. 추위가 심해졌을 땐 여러 가지 물건이 쉽게 부서지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항상 다른 누군가가 고쳤어. 그래서 나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클레어는 나무 열매를 감쌌던 천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줄 책들은 대부분 도서관에 있었어. 하지만 그 어느 문제도 풀지 못했어. 훌륭한 의학서가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 구해내지 못했어. 그 많은 성전 주해서가 있었지만, 병으로 죽음의 잠자리에 드는 사람, 그 누구도 위로해주지 못했어. 손을 잡고 기도해주는 것조차 할 수가 없었어….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이 담긴 책도 있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어….』

 그때를 떠올리는 건지 클레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미안하다고 하면, 모두가 괜찮다고, 나쁜 건 없다고 말해줬어….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모두가 더럽혀 버린 침구 세탁도 할 수가 없었다고! 비누를 다 썼지만 그걸 항상 만들어 주던 사람은 이미 죽어 버렸으니까! 도서관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연금술사의 책을 몇 권 찾을 수 있었어. 거기에는 비누를 만드는 방법이 적혀있었지. 하지만, 기름과 재와 베이킹소다를 섞으면 된다는 내용과는 달리 안 됐어! 베이킹소다를 조금만 넣으면 된다고 했단 말이야! 언제나 그랬어! 책에는 해결 방법이 있었지만, 무엇하나 도움 된 적이 없었다고!』

 클레어가 외쳤다.
 지금까지 참아온 모든 것들이 흘러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아. 나쁜 건 책이 아니야. 나쁜 건 나야.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쓸모없는 귀족 아가씨일 뿐이야….』

 물레방아의 수리도 막연한 생각만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막연한 생각치고는 너무나 무모했다. 그렇다는 건 클레어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적어도 어느 하나만이라도 해결하고자 했으나 서서히 수렁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난 귀족이 아니잖아?』

 클레어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얼굴을 하며 억지로 웃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무것도 못 해내는데? 쟈드가 일을 찾아준다고 해도, 어차피 못해낼 텐데. 무리야!』

 외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클레어는 현명하며, 분명 자신보다 생활력이 강할 것 이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을 연속해서 당한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불안감에 무너지려는 그녀에게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분명 잘 될 거야.』

 진심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뭘 알아?』

 서적상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만 할 뿐, 1인분도 못하는 네가.
 그런 무언의 압박에 나는 기가 죽어버렸다.

『아버님은 왜 날 혼자 남겨둔 거지…?』

 클레어는 깊이 생각에 빠진 듯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나도 같이 죽어버렸다면….』

 오싹함에 내가 말문이 막혀있자, 클레어는 갑자기 머리를 좌우로 흔들더니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간 내가 건네준 천을 건넴과 동시에 거칠게 밀쳐내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클레어!』

 불러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돌계단을 뛰어올라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클레어가 사라진 후, 무척이나 맑은 날씨와 침묵이 바보가 된 나를 감싸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책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관심이 없기 때문― 이라고 굳게 믿었다.
 책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라고 물어본 후 그것에 대해 쓰인 책을 건네주면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책에 쓰여 있으니까.
 그렇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조소마저 흘러나왔다.
 클레어는 필사적으로 책을 읽었다. 힘든 상황에 있던 수도원과 그런 비참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을 손에 든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것을 클레어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비난할 수 없다.
 훌륭한 치세를 만드는 통치방법이 적혀있는 책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신의 뜻을 따르는 훌륭한 종으로써 사는 방법이 적힌 책은 몇 권이나 될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교회법이 적힌 책만 존재한다면 신의 이름으로 평화를 불러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혼란스럽고, 나쁜 통치자는 수도 없이 많다.
 책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실뽑기와 철의 제련, 목공을 다룬 책이 있다고 공방에서 장인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책은 책이고 기술은 기술인데, 나는 그런 당연한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책이 필요하지 않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탁상공론.』

 나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수로 옆에 주저앉았다.
 시선의 끝에는 그것의 결정체인 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결국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도서관 이외에 어디로 간들,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뿐이었다.
 클레어에게 말을 걸겠다고 필경실 앞까지 갔지만 노크는 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도서관 안에서 책을 찾는 것뿐.
 그리고 클레어를 위로할 만한 책은 찾지 못했다. 아니, 글자만 보면 얼마든지 있었다. 견뎌내라든가, 기도하라든가 혹은 신경 쓰지 말라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쟈드가 클레어를 위로했을 때처럼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말은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열중하고 있을 땐 마치 마법에 걸려 산조차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 책의 마법은 여자의 눈물로 씻겨져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클레어를 위로하려던 이 책엔 문자가 번져 있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던 것이다. 클레어도 힘들 때마다 위안을 찾기 위해 책을 폈다.
 "신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라는 부분의 글자가 번져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쓰라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양피지로 기록된 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책의 본 모습이다.
 책에서 눈을 떼 고개를 들자, 아름다운 노을이 머금은 붉은 빛이 채광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책은 침묵할 뿐 말하지 않는다.
 책은 단순한 「물건」일 뿐이다, 라고 인정했다.
 쟈드가 책을 읽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모든 마법이 풀려버린 나는 "성실하게 일하자"라고 생각했다. 책의 세계는 결국 책의 세계일 뿐이다. 그곳에서 살고자 함을 허락받은 이들은 그야말로 꿈같은 자산을 가진 귀족들, 또는 아브레아 같은 특수한 입장의 인간들뿐이다.
 벽에 등을 기대고 내팽개쳐진 다리의 무릎 위에는 귀중한 책이 펼쳐져 있는데 나는 글자를 쫓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리 만치 개운하고, 어떤 속박이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분명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내 안에서 느껴지던 것은 강렬한 외로움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등과 맞닿아 있는 벽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기분 탓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문을 닫는 듯한 소리와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클레어가 필경실에서 나온 것이다.
 긴장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자, 그 발소리가 몹시나 불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걸음, 한걸음,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클레어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는 자신이 한심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그대로 서재의 주위를 빙 둘러싼 회랑을 걸으며 도서관에서 나간 것 같았다.
 나는 살짝 고민한 끝에 결국 책을 덮고 일어섰다.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은 알고 있지만, 클레어의 그 말 한마디가 떠오르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원래 우리가 오기 전 클레어에게 펼쳐진 것은 절망이었다. 자신이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이라고 상상하자, 나는 클레어의 강함에 경탄하게 된다.
 동시에 세상에 깨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도 떠올렸다. 책도 수백 년에 한번은 새롭게 만들어 내야 한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걱정이 드는 것은 결코 지나친 생각이 아닐 것이다.
 내가 서고에서 나왔을 때 복도는 어두웠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붉은 색이 불필요할 정도로 불안감을 조성한다.
 도서관에서 나오자, 해도 상당히 기울어져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었다. 동쪽을 바라보자 하늘은 깨끗한 밤(夜)의 색이 되어 있다.
 클레어는 어디로 간 걸까. 의외로 다시금 씩씩하게 물레방아 쪽으로 간 게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을 고쳤다. 비틀거리던 발소리가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정 왼쪽에 위치한 교회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쪽을 보았지만, 클레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도서관으로부터 거리가 있어 종종걸음으로, 아니면 뛰어가야 교회에 갈 수 있다.
 나는 결국 도서관 맞은편, 식당이 있는 건물의 문을 열었다.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지만 전혀 모르는 곳에 온 것 같았다. 클레어는 원장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후 줄곧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을까, 라는 생각에 숨도 쉴 수 없게 된다. 불안감에 심장 박동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탁” 하는 소리가 났다. 주방 쪽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한발 한발 나아갈 때 마다 어둠이 짙어져 간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이곳에서 소리가 난다. 아궁이와 우물 등이 있는 주방엔 문이 설치되지 않았다. 입구 옆에 서서 조용히 심호흡한다. 클레어가 배고픔을 느껴 뭔가를 먹으러 온 것이라면 다행이다.
 조용히 심호흡을 하는 도중에도 탁…. 탁…. 띄엄띄엄 이어지는 소리에 뭔가 역동적인 뭔가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야말로 유령이 생전에 물건을 찾으러 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겨울의 태양은 곧 힘을 잃고 쓰러지려 하고 있다.
 나는 각오를 하고 살짝 주방을 들여다보았다. 바라본 곳엔 클레어가 이쪽을 등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유령처럼 벽장을 향해 고개를 돌려 선반을 향해 손을 뻗어 뭔가를 쥐었다. 클레어는 손안의 그 뭔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을 하듯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 뭔가"를 보고 전율을 느꼈다.
 그 손에 쥐고 있던 것은 칼이었으니까.

『아!』

 어느새 뛰어나가고 있었다.

『안돼! 무모한 짓은 안돼!』

 말 그대로 달려나갔다. 정신없이 달려가 클레어가 옆에 들고 있는 칼을 왼손을 뻗어 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클레어의 어깨를 붙잡고 힘을 짜내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이곳은 수도원이라고! 그리고 클레어라면 잘 해낼 거야! 나 같은 것보다 제대로 일을 해낼 거라고!』

 설득력 같은 건 없어도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말을 속으로 외쳤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눈을 휘둥그레 뜬 클레어가 말했다.

『뭐, 뭐야?』
『뭐라니! 칼로 뭘 하려고 했던 거야!』

 격앙되어 있자 클레어는 당황한 듯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시선이, 나를 벗어나 다른 곳을 향했다.

『뭐라니…. 너, 너어, 손, 손!』
『그런 건 아무래도…. 응?』

 나는 그 후 뭔가를 느꼈다.
 칼을 붙잡은 쪽의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으, 으악!』

 칼에서 손을 떼자 떨어진 칼날 위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칼을 붙잡을 때, 날 쪽을 붙잡은 것 같다.

『어, 어, 어, 어떻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리고 손목의 안쪽을 강하게 쥐고 잡아!』

 클레어의 말에, 나는 자신의 손목을 아플 만큼 쥐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출혈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손바닥을 보자 깨끗하게 베여있다.
 클레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천 조각을 들고 이빨로 찢어 조각냈다. 그것은 네가 건넨 아마포로, 클레어가 눈물을 닦았던 것이다.
 나는 책에서 본 적은 없었으나 여자의 눈물이 담긴 그것이 다친 곳에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 좀 들어봐.』

 클레어가 쭈그려 앉아 내 손을 본다. 피를 보고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채 재빨리 천을 둘렀다. 얼굴을 찡그린 것은 아픔을 느낀 것이 아니라 아플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해서다. 꽉 묶고 나니 천이 서서히 붉게 물들여져 간다. 통증이 심하진 않지만 오래도록 욱신거렸다.

『어깨 위로 손을 올려. 더 힘껏.』

 클레어가 말한 대로 나는 힘껏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상처는 깊지 않아. 길게 베였기 때문에 피가 좀 많았던 거고, 조금 지나면 멎을 거야. 멎지 않는다면…. 억지로 멎게 할 수 밖에 없지만.』
『…. 어, 억지로?』

 뭘 하려고, 라는 생각에 되묻자 클레어가 말했다.

『시뻘겋게 될 때까지 가열한 철봉을 대서 상처를 태워버리는 거지. 아플 테지만 빨리 멈추는 방법이야.』[각주:5]

 상상만 해도 기절해버릴 방법이다.

『괜찮아. 아픈 건 잠깐이야. 너라면 바로 기절해 버릴 테니까.』

 농담이라는 걸 알게된 나는 힘없이 웃어 버렸다.
 그때 흐른 이상한 침묵은 클레어가 뭔가를 생각하듯 시선을 돌린 탓이었다.

『그보다, 뭐야?』

 그리고 클레어는 나를 노려봤다.

『갑자기 달려오더니…. 역시 너는….』

 클레어가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하기에,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이쪽의 답변이기도 했다.

『클, 클레어야말로 이런 곳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응?』
『카, 칼로 뭘 하려고 했던 거야? 보고 있었거든!』

 나는 비난하듯 말하자, 클레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바닥에 떨어진 칼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비웃지 말라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항아리 마개를 자르려고 했던 것뿐인데….』
『엥?』

 나는 놀라면서도 클레어의 말에 왠지 모르게 수긍이 되었다.

『서, 설마 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그렇게 약해 빠지지 않았어!』

 힘껏 고함을 쳤지만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었던 것은, 불신에 가득 찬 말을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다, 단지, 자고 일어났더니 눈을 뜨자 목이 아팠기 때문에…. 꿀을 먹으려 했던 것 뿐이야.』

 목이 아팠던 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조금 기분 나쁜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그런 것처럼 보였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클레어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으음. 그랬을지도. 잠깐 생각했었어.』
『뭐어!?』
『괜찮아. 지금은 아냐.』

 클레어는 싫다는 듯 말하더니 일어섰다.

『일어날 수 있겠어?』

 그리고 손을 내밀어 준다. 나는 오른손을 내밀어 클레어의 손을 붙잡았다.

『수전노는 아니었네. 다행이야.』
『그런가.』

 클레어는 많은 것을 알아 차린듯하다.

『상처를 치료하는 게 익숙해 보이네.』

 그것도 책을 통해 알았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내 영지는 전쟁터였다고. 성에 있을 때는 부상으로 옮겨지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많이 배운 거지.』

 물레방아에서는 자신보다 어린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어른스러워 보인다.
 이상한 여자네, 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약초로 연고를 만들어 줄게. 혹시나 열이 날지도 모르니까.』

 모험담을 읽고 있으면, 다친 영웅이 상처를 고치기 위해 약을 만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나는 한번 대충 따라 해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고, 마워.』

 내가 머뭇거리며 예를 표하자, 클레어는 한숨 섞인 말을 건넸다.

『별도의 감사 표시는 됐어.』
『그, 그렇지만.』
『줄곧 속으로 나를 걱정해준 거지?』

 내가 허를 찔린 듯 반응하자, 클레어는 기가 막힌 듯 말했다.

『정말이지, 엉뚱하다니까.』
『크, 클레어 때문이야.』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대꾸했지만, 클레어는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 후 클레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꿀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있지, 벽난로에 불을 피워 줄래?』

 왠지 모르게, 클레어가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바라봐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다.





 손을 다쳐서 걱정해주고 있던 것인지, 불은 클레어가 피웠다.
 단, 불을 피우는 시간이 좀 걸린 것으로 보아 부싯돌로 불을 피운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라고 생각했지.』

 클레어가 원한 가득한 눈빛으로 말을 건네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불만이야.』

 클레어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불이 켜진 벽난로 앞에 세운 무릎을 안은 채 마주 앉았다.

『익, 익숙하다고 생각해.』

 진심 반, 위안 반.
 클레어의 얼굴도 고마움이 절반, 쓴웃음이 절반이었다.

『저택에서 살 때 소위, 귀족 아가씨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었어.』
『그래?』
『전쟁의 흐름에 따라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그런 마음가짐을 가졌던 거지. 하지만 스스로가 갈아입을 준비를 하고, 스스로가 식기를 올리는 것만으로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철부지다움이 말 그대로 "아가씨" 단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넌 상회엔 왜 있는 거야? 서적상의 제자인지 뭔지라며.』

 클레어가 그런 질문을 하자 나는 당황했다.
 설마 클레어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회에서는…. 일단 책의 장정 수리를 담당하고 있어. 금 세공사의 제자로 들어갔거든.』
『헤?』

 의외라는 얼굴을 하기에,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덧붙였다.

『일단, 그러니까 말이지? 나도 서툴고 제대로 된 상회일을 할 수가 없었어. 제자로 들어간 것도 말 그대로 스승의 팔을 물어뜯어서 들어간 거지. 뭐, 그…. 확실히 쓸모없는 식충이라고 할까.』

 클레어는 그런 나를 보고 기간 막혀 하는 것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흠, 이라며 코가 흔들거릴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난로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듯이 무릎에 턱을 얹고, 얼굴을 살며시 기울였다.

『역시 꿈만 가지고 있던 거야?』

 살며시 다가온 그 곁눈질에, 나는 알몸으로 서서 있을 때 마냥 얼굴이 붉어졌다.

『자각은 하고 있지만….』

 실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 건지 알 거 같아.』
『무슨 소리야?』

 클레어가 얼굴을 돌리며 물어본다.
 나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감추는 것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물레방아 때 일이야.』
『물레방아, 일?』

 클레어는 다소 이쁜 척을 하듯 턱을 비스듬히 기운 것은 클레어도 그 소동에서 뭔가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응. 책은 책에 불과하다, 는 말.』

 거기에 얼마나 좋은 말들이 쓰여 있고, 얼마나 유용한 지식이 담겨있든 간에, 그것은 책 속의 세상에 불과하다고.
 한 걸음을 내딛자, 정령이 햇살 아래에 나온 듯 사라졌다.[각주:6] 책의 내용을 바깥세상에 적용하려면 단순히 문자 그대로 읽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적상이 되고 싶다고, 쟈드에게 말했잖아.』
『응?』

 클레어가 되물었다. 잠시 뭔가를 회상하는 모습을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 했었어….그래서?』
『그래서 물레방앗간에 갔던 거야. 클레어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면 서적상이 될 수 있을지 몰라서.』
『….』

 클레어는 꽤 오래 고민하더니 이쪽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안가지? 아브레아에게 그 말을 듣고 나도 서적상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완벽하게 알아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다. 그러나 클레어는 역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무슨 말?』

 이라고 반문을 해와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클레어는 책은 도움이 안 된다고 몇 번 말했었지?』
『응.』
『아브레아에게 그때의 일을 말했었어. 아브레아는 "그러면 아무 쓸모 없는 거냐"고 되물었지. 서적상을 목표로 한다면,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냐고. 즉, 누군가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떠안고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책을 전달해 준다면 그거야말로 장사가 아니냐, 라는 말을 들었어. 어쨌거나 책에는 모든 문제의 해결법이 기록되어 있으니까.』

 클레어는 천천히 음식을 삼키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가 막힌 듯, 어깨에 힘을 빼는 것이었다.

『단순한 발상이네.』
『정말 그랬어. 클레어도 책을 읽었지만, 결국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잖아.』
『아, 그, 그건….』
『클레어를 탓할 생각은 없어. 왜냐하면 도서관엔 괴로워하는 사람을 위로해주는 책이 잔뜩 있을 텐데, 그 사람에게 어떤 걸 건네준다고 한들 위로가 될까? 그것과 같은 거야.』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클레어의 마음을 풀리게 했던 건 쟈드의 거리낌 없는 말투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책을 읽고 체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현실에 뿌리내리고 일하고 있는 쟈드이기에 사용할 수 있는 말투인 것이다.

『결국 나는 책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거지. 그래서 진심으로 생각했어. 돌아가면 성실하게 일을 하자고.』

 나는 수줍게 말했다.
 사실 이런 건 젖니가 빠지기 전, 꼬마일 때 깨달았어야 마땅했다.
 내가 한심하듯 웃고 있자 클레어가 불쑥 말을 건넸다.

『마찬가지야.』
『뭐?』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건 무슨 의미냐고 생각하자, 클레어는 무릎에 다시 턱을 얹더니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발가락을 바라본다.

『냉정하게 생각했다면, 원장님 말씀처럼 빨리 나갔겠지. 돈이 될 것을 챙겨 나가도 좋고, 말 그대로 쟈드에게 간절히 부탁해도 좋았을 거야.』

 하지만 클레어는 그러지 않았다. 꼬마인 척하며 쟈드를 응대하고, 납품된 물건들을 받고 난 후 의미 없이 쌓아 올리고 있었다.
 수도원에 남아있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은 없고,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혼자 수도원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멍청한 일이고, 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나도 어리석은 희망에 매달려 있던 1명.』

 탁탁 클레어는 발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리더니 살짝 웃었다.

『내가 널 보고 안타까워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네.』
『윽』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상처를 입겠지만, 클레어는 묘하면서도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마치 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거든.』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썩어간다.
 클레어는 혼자 남겨진 이곳에서 그 시간의 흐름을 막겠다고 했지만 무엇 하나 막지 못했다. 그 꼴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서적상이 되겠다는 황당하리만치 자신감 넘치던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둘 다 압도적인 무언가에 맞섰고, 자신들이 그 무언가에 이길 수 없다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함께 장난을 치고 있던 동료의 모습처럼 클레어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버티며 어깨를 힘껏 으쓱했다.
 단지 클레어가 입을 다문 후, 왠지 기분 좋은 침묵 속에서 날아오른 먼지가 다시 떨어질 무렵이 돼서야 불쑥 말했다.

『서적상이 되고 싶었어….』

 보진 않았지만 감으로, 클레어가 지은 쓴웃음이 보였다.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클레어가 말을 건네면서, 나의 발가락을 자신의 발로 가볍게 밟았다.
 어른스럽다가도, 갑자기 어린애로 바뀐다.

『평범하게 일할 거야. 지델 상회는 크니까, 가리지만 않으면 많은 일이 있거든. 글자를 읽고 쓸 줄 알면 일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
『…. 나도 일 할 곳이 있을까?』
『읽고 쓸 줄 안다면 찾는 곳이 많을 거라 생각해.』

 나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자신과 클레어가 책상 앉아 나란히 카운터에서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클레어가 싫어할까, 라고 생각할 때였다.

『같이 일하면 좋겠어.』

 하마터면 소리를 질러 버릴 정도로 놀랐다. 태연한 척 했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다.
 클레어는 그 정도로 친근한 미소를 보내주고 있었다.

『나만 일자리를 얻고, 네가 길거리에 앉으면 기분 나쁘잖아.』
『….』

 사람의 꿈은 항상 덧없는 것.

『그렇지만…. 클레어.』

 나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응?』
『알고 있어? 상회에서 일하게 되면 내 쪽이 선배가 될 거야. 그러니 내가 더 높다는 거지.』
『응? 뭐야 그게.』
『수도원에서도 그러잖아. 책에서 읽은 적 있어.』
『결국, 책의 지식이네.』

 조롱하는 말투였지만, 그것이 농담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뭐, 사실 그렇긴 해.』

 클레어는 내 발가락을 계속 밟았다.
 그것은 마치 말이 끊겨도 대화를 끝내지 않고 싶어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클레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책을 보고 쓸모없다고 했지,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책으로 익힌 지식은 풍부했기에 독서도 꽤 했을 것이다.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특별히 없어. 나는 딱히 책을 좋아하지 않아.』
『그래?』
『글자를 배운 건 원래 아버님 앞으로 오는 편지나 진정서를 정리해드리기 위해서였어. 책을 읽었던 것은 아버님께서 열심히 읽고 계셨기 때문이야.』

 클레어가 몹시 그리운 듯 말했다.

『아버님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던 거야. 좀처럼 뵙지도 못하고, 꽃다운 저택에서 외출 할 때 마다 다음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거든.』

 한순간 추억의 여운을 눈으로 쫓더니 아이러니하다는 듯이 웃는다.

『귀여운 아이처럼 보이지 않아?』

 그러더니 내 발가락을 밟고 있는 발에 힘을 싣는다.
 역시 클레어의 진짜 모습은 앳된 말괄량이인 것 같다.

『게다가 여기에 와서 분명히 깨달았어. 책을 질투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하는 클레어는 살짝 즐거워했다.

『수도원에 맡겨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어. 오히려 책을 운반하는 쪽이 요란했지. 그걸 보고 아버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느꼈어.』

 클레어는 자택의 장서와 함께 여기에 맡겨졌다. 물론 그것은 외동딸에겐 자신 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분한 것은 내가 책을 험하게 다루더라도, 책은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야. 신의 훌륭함을 호소하는 책에 몹쓸 짓을 한다고 저자인 성인이 책 속에서 꾸짖는 다던지, 평화를 호소하는 것도 아니거든.』
『책 내용을 고쳐 쓰면 그것도 가능해.』

 내가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미, 미안.』

 역시 나름대로 책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실언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쪽에서도 할 말은 있다.

『하지만, 그거에 대해 클레어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응? 뭔데?』
『책에는 물기가 있으면 안 돼. 글자가 번지고 곰팡이의 원인이니까.』
『물기라니…. 야!』

 신학자와 성직자가 쓴, 신의 위로가 담긴 책을 울면서 읽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 클레어는 얼굴을 붉히며 있는 힘껏 내 다리를 걷어찼다.

『왜 그걸 알고 있는 거야!』
『그, 그뿐만이 아니야! 책을 찾을 때 양초의 불을 사용하는 것도 사실은 안된다고! 화재의 원인이 될뿐더러, 양초가 타면서 나오는 검댕 때문에 책이 더러워지니까!』

 그 말에 클레어의 다리 움직임이 멈춘다.

『그래?』
『그래. 붓쵸 대장이…. 내 스승이신 분에게 책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대충 배웠어. 책의 수리를 받는 것이 주요 업무이기 때문에 보관의 소중함을 더욱 잘 알고 있어. 소중하게 다룬 책은 300년이 지나도 깨끗하다고.』
『알았어. 다음부턴 조심할게.』

 클레어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면, 순순히 인정하는 고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는 편이 좋아.』
『흥, 그렇지만 이제 저기 있는 책은 내 것이 아니야.』

 본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고, 클레어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뭍으로 올라가려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님이 소중히 한 책이니 사실이라면 빼앗기더라도 가지고 나오는 게 맞는 걸까….』

 그런 일을 벌이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클레어 자신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네.』

 클레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심?』
『그래. 이로써 아버님께서 나보다 아니, 나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던 책과 떨어질 수 있게 돼서 안심이 돼. 오히려 상대가 덤벼드는 존재라면 할퀴어서 울릴 수 있고, 이복자매였다면 이야기는 더 간단하지.』

 귀족 계급이라면 자주 겪는 일.
 하지만 클레어의 상대는 말하지 않는 책더미인 것이다.

『게다가 아버님은 나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으셨고.』

 분명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많은 걸 남겨주고 가셨잖아.』

 클레어가 수도원에만 있을 수 있도록, 20년 내내 생활 물자를 공급하는 증서를 남겨 주었다. 무엇을 더 바라는지 나같은 평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  알고 있어! 그게 아니라!』

 클레어도 당황하면서도 불만스러운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아니라….』

 단지 말끝이 흐려졌다.
 벽난로 속에서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게 아니라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떠나기 전에 남겨주길 바랐어.』
『한마디?』
『응.』

 클레어는 어린 여자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 한 통 만이라도 남겨주길 바랐어. 도서관에는 그 많은 말을 엮은 책이 있는데, 정작 아버님의 말씀은 남아있지가 않은걸.』

 옷이 스치는 소리가 났던 것은 클레어가 무릎 위로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역시 아버님은 나보다….』

 클레어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자꾸 몸을 움츠린다.
 나는 당황해 어떻게든 자신이 말을 건네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 부끄러워하셨던 건 아니셨을까?』

 클레어는 얼굴을 살짝 움직여 한쪽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네가 뭘 안다는 거야.』

 신분 차이를 자랑할 성격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역시 나 같은 녀석이 뭐라도 아는 양 떠드는 것은 참지 못하는 것 같다.
 단지 그 고귀함과 고상함은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생각나는 것은 있다.

『왠지 알 거 같아. 책을 보면.』

 클레어는 허를 찔린 듯한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도서관에 줄지어 늘어선 책들을 보니, 책을 모은 사람의 됨됨이 같은 것이 어딘지 모르게 드러나는 거 같아.』

 탐구의 정신에 충실했고, 책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한 후 책을 모았다.
 게다가 내용은 긍정적인 것이 많고,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며, 물레방아와 바느질에 관한 책도 있다. 고지식하고, 적극적이고, 게다가 호기심이 넘치는, 그런 멋진 인물이었다고 상상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역시 같은 남자니까.』
『….』

 클레어는 노골적으로 축 늘어진 얼굴을 나에게 보였다. 그것은 너 같은 사내자식과 고귀한 아버님을 동등하게 놓지 말라는 뜻. 그리고 클레어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옆모습이 살짝 분한 듯 보였던 것은 클레어가 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걸까.』

 다만 그 한마디는 내 말에 이해했다는 것보다도, 아버지가 편지를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를 어떤 것이든 갖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비록 나 같은 녀석의 말일지라도.

『그래.』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거듭 말했다.

『남자는 모두 부끄럼쟁이라고 생각해.』

 그 한마디엔 클레어의 차가운 한마디가 날카롭게 날라왔다.

『쟈드도?』
『아, 아, 그….』

 쟈드는 수줍어하거나, 그런 섬세한 감정과는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클레어의 아버님은 쟈드 같았을지도?』
『그럴 리 없어.』

 클레어는 분노조차 없는 절반의 웃음을 지었다.

『뭐, 그래. 부끄럼쟁이셨을 지도.』

 그리고 가만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지식하셔서 항상 영지 사람들의 분발을 촉구하셨고, 잠깐이라도 한숨 돌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는 분이셨어.』

 이교도가 영지와 접하게 되면서 항상 전투를 벌였다고 했다.
 나는 수염을 기르고, 외투를 휘날리며 말을 탄 용감한 귀족을 떠올렸다.

『전투가 없을 땐, 항상 영지를 둘러보시고, 밤엔 촛불이 다 탈 때까지 책을 읽고 계셨지.』

 그만큼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던 사람이었고, 더구나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걱정이 많으셨던 분이야.』
『응?』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땅이었으니까. 걱정한다는 건 호흡을 하는 것처럼 당연한 거였어. 그래서일까, 좀처럼 웃지 않는 분이셨지.』

 나는 그 말에 받아들이기 힘든 뭔가를 느꼈다.
 클레어의 아버지이니, 클레어가 잘 알 테지만 이 느낌은 뭐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던 중, 퍼뜩 깨달았다.
 도서관의 장서에서 느꼈던 인물상(人物像)이었다.

『언제나 찌푸린 얼굴로 책을 읽으셨는데, 그 모습이 즐거워 보이진 않았어. 그래서 나는 어릴 때 그것이 수련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니까.』

 저 도서관에 있는 것은 황당할 정도로 긍정적인 책들뿐이다. 그것들을 찌푸린 얼굴로?

『진짜 수련을 했던 건지도…. 내가 크고 나서 글씨를 배운 후에 아버님의 장서들을 읽어 봤지만, 아버님과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많았거든. 밝고 엄청나게 적극적이고, 세상엔 희망과 신의 자애가 가득하다, 같은 책들만 있었어. 걱정만 하던 아버님은 그런 책을 읽음으로써 억지로 마음속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 했던 걸지도 몰라.』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뭐, 그 때문에 더욱 분했던 걸까?』

 클레어가 불쑥 말했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빈 자리를 메워드리지 못하니까.』

 영지의 일로 속이 썩어 들어가는 매일을 보낸다면 위로가 필요하다.
 클레어의 아버지는, 과거엔 클레어의 어머니에게 마음의 평온을 얻었지만, 그 후로는 책으로 채웠을 것이다. 외동딸이었던 클레어가 보기엔, 확실히 그런 흐름은 가슴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클레어가 세웠던 무릎을 뻗더니, 손을 몸 뒤에 놓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만약 네가 말한 거처럼, 전부 아버님이 소심했기 때문이라고 하면…. 기쁘려나.』

 클레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희망을 향해 어이없어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허무해 보여 나는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수도원엔 여러 가지 의미로 혼자 남겨지고 말았다. 클레어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후후, 이상한 소리겠지.』

 뭐가? 라고 묻지 않았다.

『단순히 잉크 얼룩을 모은 것일 뿐인데 이렇게나 사람을 번거롭게 만들다니.』

 문득 침묵을 이어간다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말을 걸지 않은 건 클레어가 그 정도로 약한 소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책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상회에서 대량의 화폐나 동전을 보면 같은 걸 생각할 때가 있어.』

 클레어는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본다.

『상상되네. 우리는 앞으로 그걸 위해서 고생하게 되는 거지?』

 청빈한 성직자가 속세의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얕보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것이 클레어의 힘일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말이야.』
『좋은 걸 가르쳐 줄게. 신에게 기도할 때도 잡념은 없애는 거야.』

 나날의 생활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는 고된 일과, 신에게 바치는 기도를 동일시하는 대담함. 게다가 말하며 지은 웃음은 굉장히 쾌활해 보였다.
 클레어는 휙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일어섰다.

『아―. 왠지 잠을 푹 자고 일어나 맞이한 아침인 거 같아.』

 두 팔을 치켜들더니 으응, 하고 기지개를 켰다.
 나는 어떤 기분인지 알 듯하다.
 아마 체념 혹은 후련하다는 느낌.

『너 같은 식충이랑 말하는 것도 꽤 도움 되네.』

 심한 말이지만 어딘가 좀 낯간지럽기도 하다.
 그것은 분명 클레어가 이쪽을 바라보고 지은 표정 때문일 것이다.

『바보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서, 자신감이 생겼어.』
『도움이 돼서 정말 다행입.니.다.』

 쓴웃음과 함께 대답하자 클레어는 고개를 움츠리며 환하게 웃었다.
 입은 거칠었지만, 조금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예쁜 미소였다.

『그렇지. 절반 정도는 내 탓이고, 상처를 입힌 것도 있으니 도와줄게.』

 갑자기 그런 말을 건네와서 나는 당황했다.
 멍하니 클레어를 바라보고 있자 클레어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잊었어? 너 그 이단심문관에게 떠맡은 일이 있잖아?』
『아, 맞다!』

 목록 작성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봐, 너 정말로 상회에서도 제대로 일할 수 있겠어?』

 철이 들기 전부터 상회에 몸담은 내가, 새장 속에 갇혀 살아온 클레어에게 그런 걱정을 들었다. 물론 한심한 일이긴 했지만 크게 빗나간 지적은 아니었다.

『열, 열심히 할 거야.』
『그래.』

 클레어가 말을 이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지극히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클레어가 말했다.

『왜?』

 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내가 되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목록을 만들 때, 양초를 사용해도 괜찮지? 어차피 여기에 두고 갈 거니까.』

 나는 일부러 어깨를 으쓱한 후 다시 움츠렸다.

『괜찮지 않을까.』

 단순히 책을 험하게 다루는 정도로 클레어가 모든 걸 떨쳐낼 수 있다면, 나는 그 말을 들어줄 정도의 통은 있다.
 클레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목록 작성을 재개했지만, 클레어는 결국 양초를 쓰지 않았다.
 그것이 달빛만으로 작업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건지, 역시 책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어둠 속에서 작업 하는 동안 때때로 가만히 움직임을 멈추고, 어떤 생각에 빠져있었다.
 원래 클레어 가문의 것이기도 한데다, 이 수도원에 와서도 여러 가지로 의지했던 모양이다. 목록을 만들기 위해서 1권씩 살펴보는 것만으로 추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말을 건네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날은 결국 자정까지 작업하고 올라갔다. 클레어는 필경실로, 나는 식당 벽난로에 가서 잤다.
 아브레아는 목록을 하루 만에 만들라고 했지만, 딱히 재촉하지는 않았다. 아마 어쨌든 빨리 만들어라,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어설픈 것 같으면서도 왠지 아브레아 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태양이 얼굴을 내밀 무렵, 도서관으로 향했다.
 클레어는 아직 서고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좀 더 일찍 일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작업을 시작했다. 클레어가 찾아온 것은 해가 완전히 뜬 후였다.

『잘 잤어?』

 이렇게 묻자, 목록 작성을 위해 양피지와 펜을 준비하고 있던 클레어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덕분에.』
『그건 다행이네.』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푹 자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만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뭐, 상회에서 이런 시간까지 잔다면 혼나겠지만.』

 어젯밤에 작업한 부분을 확인하고 있자, 클레어는 차디찬 눈으로 바라본다.

『네가 바보같이 곯아떨어져 있는 걸 확인하고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성당을 쓸어 청소하고, 며칠 만에 중정에 자란 풀을 뽑고, 솔직히 보고 싶진 않았지만 어수선했던 물레방아가 있는 오두막을 청소하고 왔거든. 정말 미안하네요?』
『….』

 듣고 있으면 클레어가 겪은, 먼지 냄새 나는 수도원의 「아침」이란 외부의 마을에선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이, 일찍 일어나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해.』
『고마워.』

 걱정 없는 미소와 함께 심술궃은 모습의 꼬마아이가 있었다.
 다만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일부러 지은 듯한 미소 아래에서 진짜 미소가 드러났다.

『후후, 상회에서 언제까지 내 선배 노릇을 하려나?』
『으, 윽』

 신음을 냈지만, 왠지 모르게 클레어가 더 빨리 일을 배우면서도 잘 할 것 같았다.

『라는 건 거짓말이야.』
『뭐?』
『어제 물레방아에서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잠을 조금 자뒀잖아. 꽤 빨리 일어난 거야. 평소에는 지금쯤 겨우 일어나거든. 모두가 살아있던 때에도, 아침 기도 때는 항상 늦잠을 잤었어. 모두가 사라지고 나서는 더욱 그랬지.』

 자조 섞인 말을 한 클레어는 책 속의 성녀가 아니다.
 졸음에 굴복하기도 하고, 정해진 것을 언제나 완벽하게 해내진 않는다.
 클레어는 한 명의, 현실 속의 평범한 여자다.
 당연한 것이지만 나는 그것이 대단히 신선하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돼. 수도원에서는 노동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각주:7]이라고 했거든.』

 그 말투에선 수도원의 진지한 분위기를 비꼬는 울림이 느껴진다. 신을 언급한 농담에 웃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는 클레어는 수도원에선 약간의 문제아였을 것이다.

『이게 끝나면, 나가기 위한 정리도 해야겠지.』

 서가를 바라보며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한 클레어의 옆모습을 보았다.
 수도원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이곳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고, 분명 수도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필사적으로 고치려 한 것도 고귀한 명문가 출신이어서, 혹은 예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과 무관하게 단순히 이곳에서 즐겁게 지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 熾火. 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숯덩이 또는 다 타지 아니한 장작불. [본문으로]
  2.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서 대신 간구하는 것. [본문으로]
  3. 아마의 섬유로 만든 직물로, 리넨(linen)이라고도 한다. 섬유의 길이가 15∼100㎝ 정도인 아마의 목질 부분을 주로 이용한다. [본문으로]
  4. 고대 이집트부터 재배했던 작물이니 만큼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작물이다. 창세기 41,42, 탈출 9,31, 여호 2,6, 요한 19,40, 루카 24,12 등에서 언급된다. [본문으로]
  5. 중세의 지혈법중 하나다. 당시 외과 의사를 겸했던 이발사들은 톱이나 망치를 써서 수술을 한 다음, 빨갛게 달군 인두로 상처를 지져서 지혈을 했다. [본문으로]
  6. 중세 민담등에 등장하는 페어리(fairy, 한국에선 요정으로 번역.)가 햇빛을 싫어한다는 설정을 차용한 것. [본문으로]
  7.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 베네딕토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고 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베네딕토 수도회의 모토이다. [본문으로]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막  (0) 2017.06.03
제5막  (0) 2017.06.03
제3막  (0) 2017.06.03
제2막  (0) 2017.06.03
제1막  (0) 2017.05.2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