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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제5막

(◉◞⊖◟◉) 2017. 6. 3. 22:44

오 무렵엔 작업해야 할 분량이 많이 줄어 있었다.
 클레어는 대부분 책을 읽었었는지, 나보다 단연 작업이 빨랐다.
 아무래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대강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잠시 쉬기 위해 서고의 입구에 턱, 하고 걸터앉아 클레어가 담당한 목록 초안을 확인하자 책의 종류별로 정연하게 나누어져 있다.

『역시 책을 읽는 가문이었구나….』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실로 아쉬웠다.
 서적상이 되는 것은 체념했지만, 책에 대한 사랑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책을 읽는 가문의 여자와 책 이야기를 꽃피우는, 그런 꿈 또한 아직 마음속에 있다. 그런 이유로 목록을 손에 쥔 채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볼에 뜨거운 물건이 닿아 뛰어오를 뻔했다.

『우, 왓, 왓』
『내 작품에 뭔가 불만이라도?』

 뒤돌아보자 무효모빵을 손에 든 클레어가 있다.

『빵 좀 구워 왔어.』
『고, 고마워….』

 감사 인사를 받은 클레어는 나와 함께 계단에 앉아 빵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빵을 뜯는 손놀림이 빨라 보인다. 식욕이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뭔가 재밌는 책이라도 본 거야?』

 빵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작은 병의 손잡이를 잡고는 물, 혹은 뭔가를 마시는 클레어가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은 수도원에 있는 귀족 아가씨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건강하면서도 신비한 매력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클레어가 뭔가를 느낀 듯 이쪽을 바라봐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 전부 재밌는 책들뿐이야.』

 클레어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책을 좋아하는구나.』

 비웃음처럼 들리는 감탄이었기에, 나는 되물었다.

『하지만 클레어도 거의 다 읽었잖아.』

 일하는 모습에서 분명 느껴졌다.

『뭐, 그렇긴 해.』

 빵을 찢는 것이 귀찮아진 것인지 덩어리 그대로를 문 채로 물어뜯었다.
 상회에서 일하는 여자아이들도 저렇게 빵을 먹은 걸 본 적이 있지만 클레어 같은 분위기를 가진 아이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또 다른 매력이 느껴져 가슴이 두근댄다.

『단지 즐거운 추억이 없었어.』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하자, 더 말을 꺼낼 것이 없다.
 시선을 클레어 너머의 서가로 옮긴 후 빵을 우걱우걱 씹고 있자 클레어가 작게 웃었다.

『다른 의미에서 네가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응?』

 되물어보자 빵을 다 먹은 클레어는 손을 뒤로 한 채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여기 있는 모든 책을, 아마 5번 씩 펼쳐봤을걸.』
『진짜!?』

 2천 권에 달하는 책을?
 내가 깜짝 놀라 멍하니 있자 클레어는 이쪽을 보더니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다.

『말 그대로 전부를 읽은 건 아니야. 이것저것 조사를 좀 해본 거지.』

 책을 좋아해서 읽은 게 아니라면 책을 읽는 것과 조사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라고 의문을 품고 있을 때, 클레어가 말했다.

『일단, 편지가 숨겨져 있지 않나 해서야.』
『아.』

 무심코 신음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이것저것 받으셨던 게 생각나서. 2중으로 된 덮개로 숨겨진 편지라든지, 아버님이 사본을 보냈을 때 그 사본 속에 편지를 숨긴 사람도 있었어. 네가 읽은 책에는 그런 거 없었어?』
『…. 있었어.』

 성전주해서의 표지와 책장 사이에 신부(神父)와 유부녀가 남긴 사랑의 증거 같은, 다양한 것들.

『하지만 찾지 못했어.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었고, 나는 이곳의 책들을 깔끔히 정렬했지.』
『정렬했다?』
『깔끔하게 분야별로 정렬되어 있었잖아? 정말 힘들었었어.』

 성전의 사본부터, 성전주해서, 신학 서적, 철학서, 현인의 일기, 연대기, 각종 이야기. 그리고 실용서.
 어렸을 때 던져진 교황청 도서관은 말 그대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을 했을까, 라는 이야기를 묻는다면. 후후. 그냥 웃을 수 있어서, 랄까?』

 기억을 추억하며 웃음 짓는 클레어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순수한 꽃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다른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수집욕이 극에 달한 애서가가 아니고서야,  그런 귀찮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표현하자면 이교도가 나무결에서 이교의 신을 발견한 일 같은 건데.』

 클레어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런 황당한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미소는 곧 슬픈 미소로 바뀌었다.

『책의 저자명이라던가, 제목이라던가, 첫 글자라던가, 그런 것들을 기준 삼아 전열 하면 나에게 전해주려던 말씀이 들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야.』
『….』
『새삼스럽게 말하니까…. 상당히 민망하네.』

 부끄러운 듯이 작은 몸을 비틀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쟈드와 함께 여기에 왔을 때 일이다. 클레어는 거칠고, 날카로웠다. 이 세상엔 구원 따윈 없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옆에 앉아 수도복 자락의 얼룩을 만지고 있는 클레어가 너무나 애처로워 보인다.
 나는 무의식중에 클레어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려 했다.

『그러니까.』

 라는 말에 정신이 들며 손을 되돌렸다.
 옷을 만지작거리던 클레어는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거 같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파진다.
 클레어는 일어서더니 이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두 사람이 와 준건, 신의 뜻일지도. 쓸모도 없는, 검은색으로 감싼 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문턱을 내려가더니 여장부, 혹은 항구에서 일하는 여자 상인처럼 허리에 손을 댄다.

『그럼, 목록을 작성도 이제 조금 남았지? 끝내버리자.』

 그런 말을 하더니 종종걸음으로 나아갔다. 마시던 물병은 내려둔 채 걸어가던 그 뒷모습에서, 감사의 말을 건넨 후 내가 놀란 것 이상의 쑥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 도서관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클레어의 아버지는 왜 클레어에게 한마디의 말조차 남겨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라고.
 귀족 중에는 자신의 혈육이라도 사랑을 나눠주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첫째 아들이 아닌 이상 재산을 놓고 다투는 불씨가 되기도 하며, 그것이 이복형제라면 그 모습을 눈뜨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클레어는 혈통 있는 외동딸이었다.
 그렇다면 만일의 경우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던 클레어의 아버지는 그 걱정의 본령[각주:1]을 이럴 때 발휘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클레어가 자신보다 책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것도 그럴 만 하다.
 물론 어떠한 말도 아니고, 생활의 양식만 남겨진 것이 얼마나 그녀를 힘들게 했을지는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상상하면 할수록 내 가슴은 아려왔다.
 클레어는 책 속에 숨겨진 편지가 없는지, 책의 제목 등을 연결해 어떤 문장이 되는 게 아닐까, 라는 것까지 고민했다.
 유일한 혈육을 잃은 여자아이가, 남겨진 언어를 찾아 서가 앞을 서성대며 구원을 청하는 순교자처럼 책을 뒤지고 있었다.
 만약 정말 엄격한 영주가 쑥스러움 때문에 딸에게 편지를 남기지 않은 것이라면 끔찍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정말 고귀한 남자라면, 딸을 위해 그 정도 부끄러움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클레어는 슬픔을 끊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런 클레어를 생각하면 나는 자신의 꿈이 무너지는 것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이라는 것은 더 강렬한 통증으로 잊을 수 있는 것이다.





 나와 클레어가 목록 작성 작업을 재개한 것은 태양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서고의 중앙 통로 양쪽에 늘어선 서가의 가장 안쪽에서 클레어가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끝냈어.』
『진, 진짜?』

 아직 가장 안쪽 서가의 바로 앞에서 작업하고 있던 나는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곧 클레어가 나타나 통로에서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어온 것이다.

『도와줄까?』

 명백한 농담이었기 때문에 언짢은 듯, 의연하게 대답했다.

『필요 없거든.』
『아, 그렇다면 나는 청소를 마무리 짓고 올게.』

 클레어는 작성한 목록을 나에게 밀어붙이듯 건넨 후,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그대로 서고 출구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심술쟁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쟈드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지만 나름대로 클레어와 친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끝나면 도와주러 갈게.』

 그러자 클레어는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됐거든.』

 입을 앙다물고 잔뜩 찡그리자 클레어는 웃었다.

『네겐 읽고 싶은 책이 잔뜩 있잖아?』

 들켰네, 라고 신음을 내는 순간, 클레어의 미소 뒤에 있던 살짝 슬픈 표정이 드러났다.

『청소는 내 마지막 일인걸. 괜찮아.』

 그리고는 걸어가 버렸다.
 표정 아래에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슬픔과 괴로움이 엿보였으나 손을 내민다면 오히려 실례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쩌면 그것은 고결함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클레어도 평범한 여자아이다.
 이 수도원을 뒤로하고 석벽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매우 불안한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다.
 하지만 쟈드라면 분명 잘 알겠지만, 나는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계기가 생기기 전까지는 가만히 두는 것이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나는 클레어가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다, 이윽고 시선을 서고로 돌렸다. 2천 권에 달하는, 너무나 귀한 책들이다. 어디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는 손에 있는 목록에 거의 다 기록되어 있다. 클레어의 처지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좋아하는 책을 바라보자 내 속의 피가 끓기 시작한다.

『크, 클레어도 말했으니까.』

 변명하듯 중얼거리면서 씰룩쌜룩 움직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쟈드가 돌아오기 전까진 자유시간이다.
 눈앞에 토끼를 발견한 사냥개처럼 독서욕을 입에서 줄줄 흘리며 목록 작성을 마무리 지었다. 모든 것이 끝나자, 욕망을 풀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나는 나를 찾으러 온 클레어에게 머리를 맞을 때까지 책 속에 빠져있었다.
 클레어는 기가 찬 듯이 바라봤다. 식당엔 무효모빵과 구운 물고기, 냄비에는 삶은 콩으로 만든 수프가 끓고 있다. 클레어는 청소 때 필요한 천을 확보하기 위해 쟈드가 가져온 납입품 중 일부를 비웠다고 했다.
 하지만 냄비를 가득 채운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이에 관해 물어보자 수도원은 나눔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밭에 뿌리고 새의 먹이라도 준 걸까.
 어쨌거나 나는 소금에 잔뜩 들어가 짜디짠 수프와 물고기, 그리고 무효모빵을 배불리 먹었다. 클레어도 단순히 함께 자리해준 것이 아니라, 식욕이 돌아온 모습이었기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벽난로 앞에서 허겁지겁 책을 열어젖혔고, 클레어는 나의 뒤에서 아직 부러지지 않은 바늘과 칼로 포대를 걸레로 바꾸며 다음 날 청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와줄까? 라고 말을 건넸지만, 아니나 다를까 칼같이 거절당했다.
 무리를 하는 걸까, 라고 한순간 생각했지만 진지한 얼굴로 걸레를 만드는 모습에서 목적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려는 충실함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벽난로의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어 나가자, 어느 순간 클레어가 사라졌음에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식당의 테이블 위로는 제대로 접힌 걸레가 남다른 결의를 드러내듯 놓여 있다.
 그리고 그 후 갑작스레 의식이 돌아온 것은 시간이 흐른 새벽녘이었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 들었는데 묘한 그리움과 같은 것이었다. 아브레아에게 속아 교황청 도서관에 던져졌을 때 와 비슷한 느낌.
 시선의 끝에는 가로로 된 벽난로가 있었고, 그중 석탄[각주:2]은 거의 재가 되어 있었으며, 한숨 쉬듯 열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깨달았다. 아무래도 책을 읽고 있던 도중에 잠에 빠져든 것 같다.
 벽난로 덕분에 따듯해진 벽돌 바닥이 뺨에 닿아있던 상태였기에, 나는 누운 채로 속으로 생각했다.
 행복하다, 고.
 이런 하루하루가 영원토록 계속되었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은 잠시 후 귀에 닿아있던 벽돌 바닥을 통해 들려온 발소리에 멈췄다.

『어머나, 정말 일~찍 일어나셨네요.』

 식당에 나타난 클레어에게서 그런 말을 따끔하게 듣자, 나는 자신이 보인 추태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인사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고는 읽다 만 책을 집어 들었다. 꿈에서도 책이 나왔는데 거기서도 그 책을 읽었던 것 같아 어디까지 읽은 것인지 페이지를 찾으려 한순간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가 나서 손을 멈추었다.

『점심은 필님께서 만들어 줬으면 좋겠습니다만?』

 나는 책의 그늘로 얼굴을 숨기고 손만 접시에 있는 빵을 집었다.
 그리고 클레어는 청소를 위해 밖으로 나갔고, 나도 도서관에 있는 새 책을 가지러 갔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어떤 것을 읽어야 할지, 헤매는 것이 괴로워하는 것도 기쁜 일이다.
 게다가 이 도서관에선 손에 잡히는 모든 책이 훌륭하고 흠잡을 데가 없다. 오전 중에는 고대 철학자의 짧은 논문을 다 읽었고 다음으로 무엇을 읽을까, 라며 목록에 의지한 채 도서관을 서성였다.
 그 순간 검은 뭔가가 내 손에 있는 목록을 뺏어가 버렸다.

『이게 서고의 모든 목록입니까?』

 목록을 주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아브레아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 그, 그렇습니다.』
『호오』

 아브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귀한 책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을 무서운 기세로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목록 일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오기입니다. 이것도. 여기도 오기입니다.』

 이름의 철자나 제목에 차례대로 손가락을 가리키고는 오기, 오기, 위서, 오기라고 말해나갔다.
 나는 그런 아브레아의 옆 모습을 기가 막힌 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은 걸까.
 독서는 탐구의 정신이라던 이 사람은 도대체 뭘 요구하는 걸까.

『이 목록은 서가의 배치대로 기재되어 있는 건가요?』

 그 질문에 나는 답한다.

『그, 그렇습니다. 클레어가 정확히 내용별로 전열 해둔 거 같아서.』
『하하, 그거 훌륭하군요. 교황청의 도서관도 그렇게 해야 할텐데요.』
『전 이제 싫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아브레아는 문득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뭐, 도움 되었습니다.』

 목록을 되돌려주며 한 그 말은, 목록에 대해서인지 아니면 몇 년 전에 나를 이용한 것에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을 이야기하건 말이 된다.

『읽지 못한 책이 꽤 있지만, 어떻게든 될 거 같네요.』

 아브레아는 턱에 손을 대고 뭔가를 계산하듯 중얼거렸다.
 역시 아브레아는 단순히 독서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뭔가 목적이 있는 듯하다.

『괜찮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만.』

 쟈드가 옆에 있었으면 그만두라고 했겠지만, 아브레아가 하고자 하는 것의 한쪽 끝을 엿볼 수만 있다면 해볼 만 하다. 더군다나 책만 읽는 아브레아가 읽지 못한 책은 상당히 귀중할 거란 기분이 든다.

『흠.』

 그러나 아브레아는 작게 끄덕거리더니, 나를 바라보면서 노골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이 책들 사이에서 제가 찾는 걸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요?』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냉정하게 거절했으나, 내가 생각해도 독해력에서는 차이가 심할 것이다.

『…. 죄송합니다.』

 내가 그렇게 대답한 직후였다.

『그런데 서적상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갑자기 화제를 바꾸기에 깜짝 놀랐으나, 아브레아의 생각에 일일이 의문을 품을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사실만을 대답해야 한다.

『물론 무리일 겁니다.』

 멸시하는 걸까, 라고 생각했지만 아브레아는 작게 끄덕이기만 했다.

『그렇겠죠. 책이 실제로 도움을 준다는 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거금을 들여서 책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알고 있었다면 말해주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말보다는 경험을 해봐야 내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브레아는 그런 곳까지 꿰뚫어 본 걸까 라고 생각했지만 추측일 뿐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그 용기 있는 제안도 이번만큼은 거절할 겁니다.』
『네?』

 아무래도 아까 내가 건넨 제안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아브레아는 문득 시선을 서가를 향해 책 표지를 여자와 같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스윽, 쓰다듬었다.

『여러분은 물레방아의 책을 읽었지만, 물레방아를 고칠 수 없었다.』

 엿듣고 있었던 것 같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녀석이다.

『그러니까 여러분과는 이야기가 안 되는 겁니다. 글자를 읽는 것이라면 가능해도 책에서 내용을 끌어내는 건 지금은 무리니까요.』

 그래서요, 라며 욕을 하고 싶었지만 아브레아의 얼굴은 자신의 꿈에 빠져있어 보였다. 너무도 즐거운 표정으로. 그런 얼굴에는 분노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 그렇다면? 누구?』
『연금술사, 그것도 초일류.』

 아브레아의 짧은 한마디에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납을 금으로 바꾸며 영생을 얻으려는 계획을 꾸미는, 신을 거역하는 자들.
 이단심문관이 걸친 흑의와는 상반되는, 지식 세계의 악마들이다.

『그들의 힘이라면 어떻게 든 실현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책의 세계에 숨겨진 수수께끼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겠죠. 그들의 직업은 독서가가 아니니까요.』

 아브레아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마을에도 다양한 일자리가 있어서 상회 속에서도 업무가 나뉘어 있고 각각 전혀 다른 일로 나날을 보낸다.
 내가 그 말에 숨을 마신 것은, 이 아브레아 조차도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크기와 복잡함을 통감했다.

『그래서 저는 제 인생을 소비해 그들을 위해 수많은 책을 섭렵하고, 옅은 포도주를 짙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게는 아브레아 정도의 인간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지, 전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수많은 책을 읽는 것은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책 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현실에 불러내기 위해 연금술사가 필요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나와 클레어는 물레방아 수리를 위한 지식조차 현실에 적용할 수 없었다.
 아브레아는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다.
 머리가 욱신거려 질문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신은…. 이 책들…. 어떤 걸 현실로?』

 흑의를 두른 이단심문관은 나를 향해 뒤돌아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천사입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저는 책에서 천사를 불러내려 하고 있습니다.』 

서적상이 되고싶다는 꿈이 작게 느껴졌다.

『그, 그런 일, 을….』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단호하다.

『기록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지만요. 그리고 저는 천사가 과거에 실존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심이 독실한 사람들은 하늘에 신이, 그리고 천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브레아가 말하는 것은 분위기가 분명 다르다.
 천사를 일컬어 현실이라던가, 개나 돼지라던가, 아니면 목욕하지 않아 때가 잔뜩인 인간 같은 존재,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책에서 천사를 불러내는 방법이 기록되어 적절하게 그 방법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그에 적합한 기술을 가지고 인물들에게 주면 됩니다. 잉크로 작성된 마법진에서 마법을 불러내는 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경우에도 물레방아의 책을 목공 장인에게 가져갔다면 분명 물레방아를 고쳤을 겁니다.』

 그건 분명 그렇다. 그리고 그걸 위한 연금술사.
 하지만 너무나 굉장한 꿈이며, 더는 망상의 영역이었다.
 자신과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멍해 있는 내 어깨를, 아브레아는 탁하고 두드렸다.

『책은 훌륭한 지식의 샘입니다. 당신은 서적상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책이 당신에게 힘이 되어줄 겁니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독서에 힘을 쓰는 걸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레아가 보인 미소는 불편하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였다.
 같은 취미를 가지고, 같은 것에 기뻐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분 같은 것.
 할 말을 다 한 것인지 고민 없이 뒤돌아 걷기 시작한 아브레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교황청 도서관에 속여 데려간 일에 대한 감정을 한방에 탕감해 버리는 미소였기 때문이다.
 이겨낼 수 없다니까, 라며 멍하니 서 있자 클레어가 들어왔다.
 팔은 걷은 채 먼지투성이의 얼굴은 땀으로 검은 줄무늬가 몇 개나 그어져 있었다.
 책의 세계에서 사는 아브레아와는 대조적인, 그야말로 현실에 살아가는 모습이다.

『과연, 쟈드가 걱정하는 이유도 잘 알겠어.』
『…. 저, 저기. 진심으로 믿는 건 아니지?』
『그래? 마치 영웅의 승리를 바라보는 소년 같았는데.』

 싸늘한 시선이 느껴져 조금은 어색했다.
 하지만, 그것까지 꿰뚫어 내자 멋져 보였다.

『뭐, 상관없어. 네가 마음이 흔들려 따라갈 거 같으면 실컷 때려줄게.』

 즐거운 듯 말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한 후 눈을 돌렸다.

『그럼 점심 빵 구워놨으니까.』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아브레아가 나간 방향으로 재빨리 서고를 나갔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서고 안을 걸었다.
 가슴 속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꿈과 현실이 조화가 이루어진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 걸까?
 비록 서적상의 꿈은 무너졌지만 이 도서관에 온 것은 나쁘지 않았다.
 세계의 가장 안쪽을 들여다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에 편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도 나는 도서관에 처박혔고, 클레어는 수도원의 어느 곳을 청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레어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으로, 아침과 점심을 식사를 대접받았기 때문에 밤에는 자신이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있을 때였다.
 클레어가 유령처럼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고 불쑥 식당 입구에 나타난 후, 얼빠진 눈을 뜬 채 비실비실 난로 앞으로 와서 멈추었다.

『진이…. 빠지네….』

 그리고 그 한마디를 입에서 내뱉은 후 쓰러졌다.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라면 몹시 당황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게다가 클레어는 바닥에 쓰러졌지만 기분이 좋은 고양이처럼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온몸을 쭉 뻗었다.
 팔을 걷어붙인 누더기 로브의 소매에서 가느다란 팔이 2배는 길어진 것 같았고, 쥐고 있는 주먹은 부들부들 떨고 있다. 상당히 기분이 좋은지 뭔가를 참는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 가슴이 살짝 떨렸다.

『으읏.』

 마지막으로 힘껏 뻗더니 바보 같은 한숨이 들려왔다.
 나는 작게 웃으며 벽난로 안으로 넉넉하게 장작을 넣었다.

『수고했어.』
『응.』

 무방비로 누워있는 클레어는 자신의 배에 손을 얹고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프다.』
『곧 준비됩니다. 아가씨.』

 클레어는 웃지도 않고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은 채 벽난로 앞에 누워있다.
 아직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때 어쩌면 어머니도 함께 있을 무렵에 철없던 클레어는 늘 이렇게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밀가루 사이로 치즈를 충분히 넣고 난 후 반죽을 했다. 한편 냄비에는 조리시간이 보관 기간이 오래된 채소들을 적당히 담았고, 소금과 마늘로 간을 한 후 난로 속에 놓아두었고, 빵을 구울 때 쓰는 철판도 장작 위에 올려둔 후에 화력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청소는 끝났어?』

 벽난로의 불을 조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클레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태울 일만 남은 걸까.』

 불안하다는 감정이 담긴, 될 대로 되라는 듯한 말투로 느낄 수도 있지만 홀가분하다는 의미도 담겨있을 것이다.

『예전 모습을 되찾으려 하지 않으니 청소하는 것도 시시하게 느껴져.』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뒤척이는 중이라는 뜻.

『상회에서 유행이 지난 옷을 대량으로 저가에 판매할 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내가 수도원에 대한 생각이 상인들의 손익계산과 같다는 거야?』

 내가 숯을 만지작거리자, 눈물을 흘리듯 불똥이 튀어 올랐다.

『어떤 이유든 두통의 원인은 집착이라는 거야.』

 누구의 말인지는 잊어버렸으나 위대한 성직자가 남긴 설교집에서 읽었던 것 같다.

『그래.』

 클레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집착이야. 우리를 괴롭게 하는.』

 내가 뒤를 돌아본 것은 클레어가 "내"가 아닌 "우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엎드려서 팔에 턱을 올려놓고 있던 클레어는 내 쪽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아니야?』

 장난을 치는 친구가 보내온 미소에 나는 화악, 얼굴이 뜨거워진다.
 벽난로의 숯불 때문이야, 라고 속으로 변명을 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네.』

 철판에 올려둔 무효모빵의 거품이 부풀다 곧 사그라든다.
 나와 클레어는 특별한 대화도 없이 식사했지만 침묵이 어색했던 것은 아니다. 희미한 외로움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나도, 클레어도 일부러 떠들며 지우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와 클레어가 조용히 빵을 찢어 음미하고, 수프를 마시던 그 모습은 기억을 회상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음식을 피와 살로 바꾸듯이.
 신성하고 엄숙한 시간이라고 한다면 과한 표현이겠지만, 먼저 식사를 마친 나는 묘한 만족감에 젖었다. 클레어도 수프를 마신 후엔 기도의 의식을 마쳤을 때와 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를 낸다면 볼품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사소한 행동도 이 조화로움을 방해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수프를 마신 클레어를 본 순간 나는 오싹했다.

『뭐, 뭐?』

 클레어가 당황하며 물어온다. 나는 그 모습에 끝내 참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입이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입술과 이빨을 악물었지만 무리였다.
 내가 웃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클레어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사람 얼굴을 바라보고 웃다니….』
『이, 입.』
『뭐?』

 화를 내는 클레어에게, 나는 끝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하하, 입이, 클레어의 입 주위가, 푸하하!』
『입 주위가 왜? 뭐, 뭐가, 아무것도 없잖아!』

 손바닥으로 입을 닦는다. 클레어의 말 대처럼 음식물 찌꺼기가 붙어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배를 안고 숨이 끊어질 듯이 웃으며 말했다.

『청소하고 있어서, 먼지투성이로 왔기 때문에…. 푸하하.』
『먼지?』
『아하하하…. 얼, 얼굴이 먼지투성이인채…. 크흑…. 스프를 마셨으니까….』

 내가 설명하며, 자신의 입 주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클레어는 눈썹 사이로 나뭇가지를 끼울 수 있을 만큼 불쾌한 티를 내며 나를 째려보다, 눈썹 사이가 벌어지며 주름이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눈썹과는 반대로, 얼굴은 상기되었다.

『서, 설마!』

 화들짝 놀라며 입을 로브의 소매로 가린 클레어지만, 인제 와서는 늦었다.
 충분할 만큼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향해, 충분할 만큼의 경배를 해주었다.

『그래도 곰의 입 같아서, 귀, 귀여웠…. 어…. 끄흐흑.』

 어떻게든 포장해주려 했지만, 또다시 웃어 버렸고, 결국 클레어 쪽에서 빈 용기가 날라왔다.

『그만해 좀! 그만 웃으라고! 화낼 거야!』
『이, 이미 화내고 있잖아? 푸하하!』
『인제 그만! 그만 웃어! 바보야!』

 클레어는 마침내 덤벼들어 나의 옷과 어깨를 붙잡았고 거칠게 때렸지만, 내가 웃음을 멈추지 않자, 클레어도 기침이 날 정도로 웃기 시작해 둘은 난로 앞에서 박장대소 해버렸다.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웃음의 파도가 가라앉았을 때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정도로 피곤했다. 클레어도 바닥을 짚고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클레어는 심호흡을 몇 번 한 후에 얼굴을 들어 올렸지만 너무 웃어서 그런지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고 손등으로 닦아 내자 점점 더 끔찍한 얼굴이 되어갔다.

『어, 얼굴을 씻고 오는 편이 좋겠어. 굉장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코를 훌쩍이며 눈가를 닦던 클레어는 웃음의 여운을 기침과 함께 끝내며 수도원의 엄숙한 공기에서 체온을 낮추려 하는 건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럴까.』

 그렇게 대답했지만, 클레어는 한숨을 내 쉰 채 진이 빠진 몸을 이끌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귀찮음은 알고 있다. 이대로 곯아떨어지면 필시 기분이 좋겠지.

『우…. 분명 얼굴은 씻고 싶어. 하지만 이렇게 추워선….』

 눈과 먼지로 얼굴이 새까매진 클레어는 박장대소한 후의 무력감으로 인해, 지금은 전쟁에 모든 것이 불타버려 내려온 피난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막무가내의 모습에서 적어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기뻐하는, 그런 기색도 보인다.

『목욕은 어때?』

 내가 그렇게 제안하자 클레어는 신경질적인 시선을 보내온다.

『이처럼 큰 수도원에는 목욕시설이 있지 않아? 물을 데워서 따듯한 물을 쓸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게 있긴 하지.』

 그리고 귀찮은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불을 피우고 물을 길어야 하잖아.』

 열심히 청소하고, 마지막에 숨이 막힐 정도로 박장대소한 후였기에 힘들다는 감정이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던 클레어는 잠시 침묵한 후 이쪽을 바라보았다.

『네가 끓여줘.』
『뭐? 왜. 클레어가 들어가잖아?』
『시끄럽네.』

 클레어는 일갈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여자를 울린 벌이야.』
『그게 무슨.』

 확실히 클레어의 얼굴엔 먼지 자국 위로 눈물이 흘러내려 만든 길들이 곳곳에 있을 정도로 울었지만, 그것은 이른바 「울렸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게다가 읽고 싶은 책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물을 데우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클레어는 작은 헛기침을 한 후 미소 가득한 얼굴을 보내왔다.

『부탁해.』

 그 미소라면 거절할 수가 없다. 그리고 클레어는 이 얼굴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한 듯했고, 실제로 거절하지 못했다.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여자에게는 마성이 있다고 성직자들이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내가 "아이고."라고 허리를 두드리자, 클레어는 간지러운 듯이 웃으며 "고마워."라고 말했다.





 식당에서 나오자 하늘은 아직 황혼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대단히 아름답고 맑았기 때문에 태양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대부분은 군청색으로, 은빛을 내는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클레어에게 들은 목욕시설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그 건물 뒤편에 있는 불을 때는 곳으로 갔다.
 다행히도 장작은 쟈드가 산더미처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누군가가 수도원은 지혜의 집합소라고 말했던 것은 결코 잉크 위에서만은 아니다.
 그 망가진 물레방아로 이어지는 수로는 도중에 갈라져 목욕 시설이 있는 건물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갈라진 수로는 나무판자로 가로막고 있었는데 예전 같았다면 쉽게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고 있어서 섣불리 건들이면 부서질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냄비를 씻고 난 후 수로의 물을 긷고 갈라진 수로에 물을 뿌린다. 한바탕 물을 부은 후 목욕 시설로 가서 확인해 보자 수병을 들고 있는 성모상 밑으로 물이 흘러들어와 석조 욕조를 채우고 있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투덜대며 떨리는 손으로 불을 피우고, 또다시 물을 길었다.
 제대로 불이 지펴지면 나가자, 라며 신나게 장작을 집어 놓고 기다릴 뿐이다. 잠시 그 불을 쬐다가 급수대에서 시린 손을 녹이고 있으니 곧 완전히 날이 저물어 밤이 되었다.
 하늘에는 부서진 달이 떠 있었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듯 자신의 주위를 비추고 있다.
 조금 전만 해도 무서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클레어와 함께 많이 웃은 뒤여서인지 그런 심약함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차가운 공기 속을 중노동에서의 해방감을 느끼며 걸어가 식당이 위치한 건물로 돌아갔다.
 문득 걸음을 멈춘 것은 도서관 입구의 돌계단에 클레어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별을 보기 위해서 나온 건가, 라고 생각했지만 클레어는 담요를 몸에 두르고 시선은 손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보자 무척이나 즐거운 듯 웃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뭐 하고 있어?』
『응?』

 클레어는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눈을 깜빡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책을 읽고 있었어.』
『엥?』

 놀라움의 목소리를 높이자, 클레어는 싫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어. 필경실에서 몰래 읽었어야 했을까.』

 짓궂게 말하는 클레어는 책을 덮고 일어섰다.
 나는 무슨 책인지 알고 싶어 달빛에 의지한 채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목욕 할 수 있을 거 같아?』
『어? 응…. 끓고 있을 거야.』
『마침 추워지려 했는데.』

 칭찬하나 하지 않는 아가씨였지만, 나의 관심은 오로지 책에 쏠려 있다.
 클레어가 즐겁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일부러 밖에서 본 것이다.

『그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희귀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기가 막힌 듯한 목소리에 가까스로 시선을 클레어의 얼굴로 옮겼다.

『다만, 왠지 모르게 이런 시간에 읽고 싶었을 뿐이야. 웃음이 나오는 결말이거든.』

 안고 있던 담요를 접고는 내 쪽으로 다가와 책을 그 위에 올려놓으며 내밀었다.

『정리해놔.』
『그런!』
『담요 냄새는 맡지 말고.』

 그 덧붙여진 한마디에 소금에 절인 채소처럼 시들어버린다.
 클레어는 떠나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는데, 실컷 웃었던 것에 대한 보복인 건지도 모른다.
 분명 앞으로도 이런 일을 자주 당할 것 같다, 는 생각을 하며 담요 위에 놓인 책의 표지로 눈이 빨려 들어갔다.

『은의 산?』

 목록을 만들 때 제목을 본 기억이 있었고, 읽어본 적도 있던 책.
 글쓴이는 경건[각주:3]한 상인으로, 변방에 있는 혹한의 땅에 모피를 사러 가던 본인이 도중에 조난을 당했을 때 겪은 일을 적은 것이다.
 이 책이 조금 특별한 것은 그것이 필자인 상인의 관점이 아니라 그때 동행했던, 변방에 신의 가르침을 전하던 전도사의 시점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사본도 꽤 많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클레어의 말처럼 보기 드문 책은 아니다.
 클레어가 밖에서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추운 설산의 이야기를 추운 곳에서 읽었을 때 현장감을 더 생생히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교집은 타락이 가득한 술집보다 조용한 장소에서 읽었을 때 더 와닿는다.
 하지만 내가 그 책을 보고 멍하니 서 있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어째서 이런 책을?』

 그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게다가 클레어가 남긴 말.

 ― 웃음이 나오는 결말이거든.

 나는 클레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한 별당 쪽을 바라본 후, 다시 손안의 책에 눈을 두었다.
 이 책은 설산에서 눈보라로 인해 맞이한 극한의 상황을 기록해 둔 것이다.
 상인은 무사히 귀환했지만 전도사를 비롯한 많은 동료가 지금도 설산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신께서 나와 사람들을 얼마나 다독여 주었는지, 말 그대로 거룩한 이야기를 과장해 담은 교회를 위해 만들어진 내용이지만, 「웃음이 나오는 결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지막 이야기는 이렇다. 전도사가 신께 기도하며 불운에 휩쓸리면서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상인에게 천사가 축복을 내려주길 기도했다. 그러자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나며 상인에게 길을 알려주었다는, 기적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그리고 속세의 욕망에 얼룩져있던 상인은 진정한 가르침을 깨닫고 이 기적을 전달한다는 사명을 가슴에 새기고 하산한다. 전도사 자신은 양을 이끈다는 자신의 역할을 끝냈다고 확신하며 신의 품으로 나아간다는, 그런 이야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웃음이 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저자를 알고 있는 상인들은 설산에서 간신히 돌아왔음에도 동상에 걸리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그것이 신의 가호라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클레어는 그런 이유로 웃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종일 수도원을 청소하고, 식사한 후에 벽난로 앞에서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조용한 밤하늘의 별 아래 책을 읽고 있는 것이, 그런 꼬인 성격 때문이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기억 오류가 있지 않은지 책을 펼쳐 휙휙 넘겼다. 곳곳에 있는 삽화들도 본 적이 있던 것들로 찾아볼수록 줄거리는 내 기억과 얼추 맞았다.

『으―음….』

 이라는 신음과 함께 마지막 부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어?』

 양피지의 감촉이 묘하다. 이상하리 만치 부드럽고 촉촉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넘겨보았으나 역시나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른 페이지와는 느낌이 다르다.
 담요를 옆에 두고 책을 단단히 붙잡은 채 열어보았다.

『활석 가루다. 양피지가 아직 새것이야.』

 글을 쓸 때 울퉁불퉁한 양피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활석 가루를 뿌려 문지르는데, 그때 묻은 것이다.

『마지막 부분만 나중에 만들어 진 걸까? 그런지만….』

 왜 마지막 페이지만, 이라며 자세를 고쳐잡고 바라보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마지막 순간.
 거기에 나는 믿을 수 없는 한마디를 찾아냈다.

 ― 이렇게 신의 기적으로 고난을 겪은 사람들 모두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뭐?』

 어안이 벙벙해져 앞선 페이지들을 다시 들춰보았다.
 설산에서 조난 되었을 때 불운에도 신을 모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사를 통해 신의 기적이 발현되는 장면까지는 같았다.
 하지만 페이지의 마지막 부분만 양피지가 새롭다는 걸 생각해보면 내용이 변경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이고, 따라서 책의 내용이 바뀐 것도 몇 년 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 때문에?」라는 것이다.
 게다가 클레어의 아버지는 걱정이 많고, 까다로운 영주였다고 했다. 좀처럼 웃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 영주가, 이런 황당무계하고 바보 같은 이야기로 새롭게 써냈다고? 그리고 이걸 읽고 히죽히죽 웃음을?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낸걸까, 라는 질문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 기억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잠시 고민을 하고 있자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녀석이 있다.
 나는 책을 가지고 도서관으로 뛰어들어갔다.
 큰 보폭으로 태평함이 지배하고 있는 서고로 뛰어들어갔다.
 아브레아의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독서를 방해하는 것에 대한 반응은 이해가 된다.
 아브레아는 무섭게, 그리고 언짢은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그 시선을 튕겨내듯 「은의 산」을 들이밀었다.

『이 책 말인데.』
『뭡니까? 「은의 산」…. 아, 그 졸작 말인가요.』
『결말이 기억나십니까?』

 아브레아는 언짢음이 사라진,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도사의 개죽음으로 상인만이 홀로 마을로 돌아가 기적을 보여 사람들을 회개하게 했다, 뭐 그런 재미없는 결말입니다.』

 내 기억과 같다.
 나는 페이지를 펼쳐 조용히 가리켰다.

『흐음?』

 아브레아는 물끄러미 바라보다니 책을 손으로 밀쳐냈다.

『시간 낭비입니다.』

 코를 킁킁거리다, 자신이 읽던 책의 속편을 읽으며 말했다.

『졸작에 경박함을 더하면 반대로 재밌을지도 모릅니다만.』

 즉, 결말을 고쳐 썼다는 것이다.
 나는 아브레아의 앞을 벗어나 수없이 그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이 책은 너무나 이질적이다. 어떤 이유로든 도서관에 있을 책이 아니다.
 아니면 이 책을 손에 넣었을 때, 이미 마지막 페이지가 수정되어 있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던 클레어의 아버지가 이런 바보 같은 결말로 다시 씌여진 책을 장서에 추가하려고 했을까? 아무리 이 서고에는 긍정적인 책들만 담겨있다고 해도 이 내용은 너무도….

『너무?』

 나는 중얼거리며 둘러싸인 서가를 올려다보았다.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잉크의 얼룩으로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책”.
 클레어가 「은의 산」을 읽던 모습을 떠올린다.
 차디찬 날씨 아래에서, 근심 없는 얼굴로, 웃음의 여웃에 사로잡혀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순간, 나에게 책의 기억이 일제히 쏟아졌다.
 무서울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새에게도 설교하며 이단으로도 의심받은 성 안브로시우스와 클레어가 필경실에서 사본으로 만든 철학자 나피클스의 책. 그 책의 표지는 바로 『행복 탐구의 책』.
 게다가 서고에 넘치고 있는 것은 어떤 책들이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클레어가 눈물을 흘리며 서가에서 꺼내온 물레방아 책의 의미도 다르지 않을까?
 저것들이 클레어 아버지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 한다면.
 저것들도 긍정적인 책이라면?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중얼거렸다. 자신의 방대한 독서 경험을 사용한다면 확인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숨을 들이마시고 클레어와 함께 만든 목록을 넘겨 책의 제목을 읽어 나가자, 거기엔 내가 이 서고 밖에서 읽어본 책이 몇 권 있었다.

『이거다.』

 나는 목록을 가슴에 품은 채 발길을 돌렸다.
 서가의 책들은 클레어가 깔끔하게 정렬해 두었기 때문에 원하는 책을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 책을 찾아 곧바로 핵심이 담긴 페이지를 열어 확인했다.

『이것도….』

 두 번째 책도 펼쳐 확인했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세 번째, 네 번째 책으로 확신했다.
 이곳에는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책들뿐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준비한 것이다.
 부정적인 책조차, 긍정적으로 고쳐 쓸 만큼!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내 머릿속에 「은의 산」을 보는 클레어의 모습이 반복되었다. 답은, 거기에 있다.
 그 후에 그것을 말로 하려 했지만 서두른 탓에 잘 되지 않는다.
 까다롭고 걱정이 많은 영주가, 외동딸과 함께 수도원으로 보낸 대량의 장서는 모두 긍정적인 책이었다. 그 성격과 맞지 않고, 일부는 웃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다. 그렇다곤 하지만 이 장서의 수는 만만치 않을 정도로 많으며 절대적인 신앙심만으로는 할 수 없는 충실함이 담겨있다.
 그 모든 답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언어가 있을 것이다.
 이 도서관 모두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버리는 단 하나의 소리가.

『아―.』

 나는 그것을 깨달은 순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얼굴에 미소가 퍼져 나간다. 그것은 기가 막혀 무릎을 꿇을 때 흘러나오는 웃음이다.
 클레어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클레어의 아버지는 정말 까다로운 사람이며, 최고의 부끄럼쟁이다.
 나는 왠지 울고 싶어지면서도 웃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다.
 도서관에서 뛰쳐나와 곧바로 굽이굽이 이어진 수로를 뛰어넘었다. 돌이 이어진 곳은 신성하면서도 다소 음침한 목욕탕. 수도사들이 몸을 깨끗히 닦아 신에게 바칠 기도를 준비하는 곳.
 나는 그곳의 문을 힘껏 열어 그 이름을 불렀다.

『클레어!』

 그 직후, 머리를 닦고 있는 반라의 클레어와 눈이 마주쳤다.
 클레어는 눈이 점처럼 쪼그라든 채 얼어붙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외쳤다.

『알았어, 알아냈다고!』

 그리고 그 직후였다.
 시야가 흔들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힘껏 뺨을 얻어맞은 것이다.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뭐, 뭐, 뭐 하는 거야!』

 클레어의 고함에 나는 쓰러진 채로 말했다.

『찾아…. 냈다고….』
『뭐!? 이, 이, 변태가, 역시 넌….』
『찾아 냈다고! 클레어의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천벌을 내려―. 뭐?』

 뭔가 무거운 것을 치켜든 기색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말했다.

『찾았어. 클레어에게 남긴 편지를.』
『하, 하지만.』
『역시나 클레어의 아버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은 클레어야. 책은,』

 이라 말하며 클레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부 클레어를 위한 선물이었어.』

 치켜들었던 클레어의 손에서 목욕에 사용되는 주석으로 만든 대야가 떨어졌다.
 삼베 옷 아래에 걸친 얇은 옷만 입고 있던 클레어는 세례를 받은 직후의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은의 산」을 읽었던 때를 기억해봐.』
『뭐, 뭐어? 뭐, 뭐야? 무슨 말이야?』

 당황한 클레어가 답답해하자, 스스로 답을 해주었다.

『웃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잖아!』
『그, 그건…. 그런 책이니, 웃을 수 밖에….』
『그래, 바로 그거야. 클레어의 아버지께서 정성과 열정으로 책을 모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야! 클레어가 웃을 수 있게 하려고 책을 모았던 거야!』

 어떤 고난에, 고통에 시달리더라도 반드시 그때 그 감정을 격려해줄 만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모은 것이다. 물레방아가 부서지거나, 도구류가 깨졌을 때도 절대 포기하지 않게끔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말이다.
 설령 자신이 이 땅에서 사라지더라도 클레어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귀중한 책의 내용을 익살스럽게 바꿔 놓은 이유는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

 클레어는 망연자실한 듯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감정의 중얼거림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이야….』
『클레어.』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안심시키도록 웃어 보였다.
 세상은 끔찍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아버지는 결국 아버지였다.
 클레어는 홀로 세상에 남겨진 것이 아니다.

『거짓말….』

 다시 한번 중얼거리던 클레어는 뚝뚝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움츠린 채 훌쩍거리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이상하리 만치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클레어에게 뺨을 힘껏 맞았지만, 일어선 후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클레어의 몸에 닿는 그 순간, 잠깐의 망설임이 들었지만 가볍게 손이 닿고 난 후엔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 클레어를 껴안았다.

『거짓말…. 거짓말….』

 클레어는 여전히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깨에 얼굴을 맡긴 채 울고 있는 클레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천장을 올려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꼴사납지만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로 하고 있던 책을 전달해주었다.
 잠깐뿐이지만, 서적상으로서 면목이 선걸까.
 책을 많이 읽어두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테니까.
 책을 읽는 것은 헛되지 않았고, 책 또한 필요한 곳이 있었다.

『클레어. 감기 걸려.』

 잠시 후 나는 그렇게 말했다.
 클레어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온수로 따듯했던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클레어는 내 어깨에서 천천히 얼굴을 떼더니 코를 훌쩍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또 울먹였다.
 클레어는 입을 살짝 열었다. 하지만 거기에선 말이 나오지 않고, 대신 턱을 당기고 눈을 치켜뜬 채 난처한 듯한 시선을 보낸 것이다.

『그….』

 클레어는 또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감사하다고 말하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

 영웅담을 읽고 찾아다닌 나는 그들의 흉내를 내며 여유롭게 행동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
 목욕한 직후, 그리고 울음을 그친 그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설레기 시작해 클레어의 젖은 속눈썹에서 눈을 땔 수 없었다.
 클레어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뭔가 말을 건네려는 순간이었다.

『어―이!』

 깜짝 놀라 몸이 움찔했고, 실제로 몸이 붕 떠 버렸다. 확, 하고 클레어에게서 떨어졌다. 
 갑작스레 수도원 전체에 울리는 소리에 나는 나쁜 짓을 하려던 도둑처럼 깜짝 놀랐다.

『뭐, 뭐, 뭐???』
『어이! 필! 클레어! 어디야!』

 그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쟈드였다.
 응? 쟈드?

『여, 여기야!』

 정신없이 바쁜 상회에서의 습관 때문에 생각도 하기 전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렇게 대답한 후, 눈앞의 클레어가 생각났다.

『클레어.』

 클레어는 중요한 일을 하던 중 방해를 받은 듯, 뚱한 얼굴을 하고 있다. 만약 내 착각이 아니라면 쟈드 때문에 방해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담을 읽어온 나에겐 물론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려고 한순간, 정면에서 거칠게 달리는 발소리가 들리며 쟈드가 나타났다.

『필!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을…. 아―!』
『아, 그게, 아!』

 쟈드의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가 들린 직후, 반대편에서 클레어의 비명이 들려 머리가 어지럽다. 클레어는 황급히 반라의 몸을 숨겼는데 그것을 바라본 쟈드가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너! 냄새를 맡는 거로 모자라서!』
『어? 엥?』
『지델 상회의 망신이이이이얏!』

 두들겨 맞으리라 생각해 눈을 감고 있었지만, 주먹은 날라오지 않았다.

『장난이야. 너에겐 그런 배짱이 없으니까! 기껏해야 목욕하는 걸 훔쳐보다 코피가 났구나! 그렇지?!』

 대신 허리를 팡팡 두드렸다.

『헉, 어, 어이. 쟈드!』

 내가 신음하자 쟈드는 정신을 차리고 정색했다.

『아, 맞다. 클레어. 이 녀석을 죽도록 패고 싶겠지만 지금은 잠시 미뤄두자.』

 그 목소리는 다급해 보였다. 대체 쟈드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 거지?
 나의 시선에도 쟈드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도망쳐야 해.』

 나는 쟈드를 바라본 후, 클레어를 보았다.
 클레어도 쟈드를 향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 내 시선을 깨닫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말이 죽을 기세로 달려온 거야. 여기에 녀석들이 오고 있어!』

 반응이 둔한 나와 클레어를 앞에 둔 쟈드가 자신의 머리를 열심히 긁으며 소리쳤다.

『온다고? 누가?』
『이 수도원을 관리하는 윗분들 말이야!』
『어….』
『클레어가 있는 게 발각되면 까다로워지잖아? 그러니까 지금 바로 도망치는 거야! 어서어서!』

 쟈드가 손짓한다.

『아, 아니, 그렇지만.』
『아! 목욕탕에 몸을 담고 싶다고? 어떤 기분인지는 알겠는데 나중에 해! 클레어도 옷을 제대로 갖추고 와!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릴 거라 추울 테니까! 기다리고 있을게!』

 쟈드는 자기 말만 하고 말이 준비된 곳으로 달려갔다. 남겨진 것은 클레어와 나뿐. 기묘한 고요함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파악했다. 쟈드는 상회에 들린 후, 그곳의 연줄을 통해 수도원의 엄마 수도원에서 윗분이 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원래 지델 상회에서 납입품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쟈드는 지델님 혹은 누군가의 명을 받아 급히 우리를 데리러 온 것이다.
 특히 클레어가 남아 있다면 성가시게 될 것이 눈에 선하다.

『크, 클레어.』

 숨을 들이마신 나는 클레어의 이름을 불렀다. 살짝 무시하는 듯했지만, 수줍어하지도 않는다.
 클레어에게 손을 뻗으며 그 눈을 바라본 채 말했다.

『도망치자.』

 나는 이제 서적상의 제자가 아니지만, 잠깐이지만 한 사람의 서적상이었다. 소중한 고객을 이렇게 둘 순 없다. 내가, 자신이 뻗은 손이 클레어를 향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 손을 바라볼 뿐 잡지는 않았다.

『뭐, 뭐 하고 있는 거야!』

 그 목소리에 클레어는 몸을 움찔할 뿐이었다.
 그때야 나는 깨달았다. 몹시 춥다, 라던가, 목욕 후의 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무척이나 슬픈,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었다.

『클레어.』

 그렇게 말하자 클레어의 시선이 내 손에서 내 얼굴로 향했다.
 클레어의 입술은 희미하게 떨리고, 눈가에 맺힌 눈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던 눈은 수정처럼 차가웠다.

『클레어….』

 클레어는 내 이름을 불렀다.

『필…. 어떻하지….』 

 클레어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나, 가고싶지 않아….』
『어째서―.』
『가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클레어는 내 손을 잡으며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그 힘은 너무나 필사적이었지만, 동시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고, 갈 수가 없어.』
『두고 갈 수 없다니? 뭘?』

 라고 하자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편지.』

 그것은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편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방대하고 너무나 깊은 심연이다.

『필, 너는 서적상이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라고 반문할 수가 없었다.
 클레어는 내 가슴팍을 붙들고 매달리며 말했다.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 곁으로 보내준다고 했잖아. 있잖아, 필….』

 클레어는 등을 구부리며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가녀린 목소리를 짜냈다.

『난…. 아버지의 책을….』

 그 뒤는 들리지 않았지만, 들을 필요도 없었다. 성전에서 "오 우리 신이시여."라는 상용구 후 어떤 문장이 이어질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클레어를 안으며 멍하니 목욕탕을 바라보았다. 뜨거울 정도로 따듯해져 있을 그곳은 가차 없는 겨울의 한기에 노출되어 김도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너무나 잔혹한, 세상의 현실처럼 보였다.
 성인이 떠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보통 사람들은 그들처럼 신의 가르침을 관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성인이 저술한 가르침의 책을 무리해서 사지 않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 기록된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그들처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한다고 해도 그렇게 될 리가 없다. 소중한 게 있다면 잃지 않기를 바라는 건 현실 세계에서는 당연하다.
 빌어먹을,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나는 서적상이었다. 안개를 파는 일을 하는 것이다.
 클레어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잠깐의 꿈이었다. 아주 잠깐, 조금의 따듯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이 목욕탕 같은 것이다. 보지 않은 것이 좋았을지도 모를 꿈이었다.
 2천 권에 달하는 책을 꺼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다. 그 이전에 수도원의 책을 반출하는 것은 어머니 수도원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치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힘이 없는 왜소한 몸으론 애당초 무리한 이야기다.
 책은 어중간하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진리가 씌어있는데, 책 밖에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
 하지만 그 어중간함을 생각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미안.』

 그렇게 말한 건 클레어 쪽이었다.
 나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어 눈가를 훔치더니 울상인 얼굴 속에서 짓궂은 미소를 만들며 말했다.

『신조차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걸.』

 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클레어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죽었다.
 무릇 책이니, 신이니 하는 것은 현실 앞에선 항상 침묵한다.

『아버님의 상냥함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클레어는 다부진 웃음을 짓더니 내 가슴을 떨어트리려는 듯 밀쳐냈다.

『정말, 고마워.』

 거짓 없는 미소조차, 이렇게 가슴이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싶지가 않다.

『자, 숙녀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잖아. 나가줘.』

 분명 그래야 하는 상황이지만, 나의 발이 곧바로 움직이지 않은 것은 클레어가 혼자 흐느끼기 위해 나를 내보내려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치만―.』
『괜찮아.』

 클레어가 말했다.

『난 그렇게 약하지 않고…. 신을 믿지 않으니까.』

 순진한 소녀가 현실을 직시한 여자의 얼굴이 된다. 그 모습은 상회에서는 당연한 모습이나, 나의 꿈을 어지러이 만든 쟈드 조차도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거짓말은 둘 수가 없다.

『그걸로, 괜찮은 거야?』

 클레어를 상처 입게 만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본 클레어는 연하의 동생을 걱정하는 것 같은,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속으로 ‘신, 이 망할 녀석!’ 이라는 욕을 했다.
 한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나는 클레어가 안에서 문을 닫았다. 하늘에는 어중간한 크기의 달이, 인기척 없는 수도원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빌어먹을.』

 나는 발밑의 돌을 걷어찼다.
 이런 일이 도대체 왜. 이렇게 세상의 흐름에 우롱당하며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그 외침을 들어주는 자는 누구도 없었다. 안브로시우스도 신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빌어먹을! 이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눈가를 소매로 거칠게 훔쳐내며 쟈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중정에 도착하자, 쟈드는 말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있었다. 서둘러 온 탓인지 말은 수레를 끌지도 않고 온몸에선 기백처럼 김을 뿜어내고 있다.

『지델님께서 좋은 말을 타고 가라고 하셨어.』

 쟈드는 딴딴한 말의 허벅지를 툭 하고 쳤다.

『클레어의 일을 말씀드렸더니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계산대는 사람이 부족한 데다가,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놈들의 확보는 무척 힘드니까 말야.』

 씩 하고 짓는 미소는 장난치는 것이다.

『한꺼번에 두 명을 고용할 수 있다고 하면, 확실히 말 한 마리 값은 싸게 치는 거네.』
『헤, 말은 잘하네.』

 쟈드가 반쯤 긍정하자 있던 기운도 빠진다. 그런 나의 모습에 쟈드는 뭔가를 물어보고 싶어 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지금은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야, 그렇게 기죽어 있지마. 또 새로운 꿈을 찾으면 되잖아.』

 기분이 좋아진 쟈드는 그런 식으로 격려한다.
 하지만 내가 우울한 것은 결코 서적상의 꿈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무력감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 클레어도 왔구나.』

 클레어의 이름에 나는 고개를 들자, 클레어는 삼베 외투 위에 후드가 달린 누추한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처음에 우리를 마중 나올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상회에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과 그 눈이었다.
 우리를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쟈드는 다부진 미소를, 나에게는 쓴웃음 같은 것을 슬쩍 보내왔다.

『괜찮아?』

 쟈드의 한마디에 클레어는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지 않더라도 갈 수 밖에 없잖아?』
『그건 그래.』

 쟈드가 웃으며 턱을 끄덕였다.

『자, 클레어은 말에 올라타. 우리는 달리자.』

 체력엔 자신 없지만, 클레어가 달리는 것보단 빠를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가 자신만 말에 올라타는 것이 불만인 듯 뭔가 입을 열려 할 때, 나는 문득 뭔가를 느꼈다.

『어라? 아브레아는?』

 흑의를 두른 이단심문관이 없다.
 그 물음에 쟈드가 "쳇"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까 서고에 가봤는데, 이 정도 격식 있는 수도원이라면 어떤 문제에 휘말려도 단호하게 돌파할 수 있다더군.』

 절반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위해 친절하게도 아브레아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쟈드는 심술궂게 말했다.

『책에서 얼굴을 한 번도 들지 않고 말이야. 대체 뭐하자는 건지. 그렇게 책만 읽어대면 어쩌자는 거야.』

 정말로 천사를 끌어내기 위해 책을 섭렵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누가 듣더라도 눈이 핑핑 돌아갔다거나, 멍청하다거나, 황당하다고 여기겠지만 나만큼은 아브레아는 정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
 책의 세계는 그 정도 깊이가 있었으면 한다.
 자신이 몰두한 세계는 그만큼 재밌는 곳이라고.

『그런 고로, 아브레아는 놓고 갈 거야. 우리만 도망치자. 일단 저 녀석도 우리를 위해 증언해준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증언?』
『자신이 무인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그동안 계속 수도원의 인간 행세를 하며 내게 물건을 받고 있었다, 라고.』

 그런 조잡한 작전으로 괜찮을지, 라고 생각했지만, 반면 어딘지 모르게 통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클레어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클레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놓고 가는 건 없지?』

 쟈드는 나와 클레어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나는 없어.』

 먼저 대답한 건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나는….』

 클레어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언 듯 시선을 도서관으로 향했다.
 부서진 달의 희미한 빛을 조명 삼아,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지식의 저장소.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방대한 편지가 남아있는 도서관이다.
 앞으로 나가려 해도, 뒤돌아볼 만큼의 미련을 남긴다.[각주:4]는 관용구가 딱 맞았다.
 하지만 끊어내야 한다.
 클레어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진창에서 발을 꺼내듯 한 걸음을 내디디고 얼굴을 이쪽으로 향했다.

『나도 없어.』

 의연하게 대답한 후, 말에 올라타기 위해 안장에 손을 얹었다.

『도와줄까?』

 쟈드의 질문에 불쾌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살리뇨 가(家) 사람은 말 정도는 탈 줄 알아.』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더니 말갈기를 붙잡고 안장 위로 올라간다.

『앗…! 어, 라.』

 몸이 올라가지 않는다. 잘 훈련된 말은 얌전히 꼬리만 흔들고 있다.

『얏!』

 다시 올라가려 하지만 몸이 올라가지 않았다.
 쟈드는 허리에 손을 대고 분투하고 있는 클레어를 보더니 살짝 재밌어 하는 거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차마 보지 못했다.
 다섯 번째 갈기를 당기며 뛰어올랐지만 훈련된 말은 귀찮은 듯 고개를 휘휘 젓고만 있다.

『아, 앗!』

 직후 클레어는 말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찌었다.

『하하, 어쩔 수 없는구만.』

 쟈드가 그렇게 말하고 클레어에게 다가가려 하자, 나는 쟈드를 밀치며 클레어 곁으로 달려갔다.
 떨어진 후 멍하니 말을 바라보던 클레어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 몸이 꿈틀하더니 진지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굳센 다짐이 산산이 조각난 눈이었다.

『클레어.』
『필….』

 필, 이라고 하기 전, 활짝 웃었던 그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제 귀족이 아니며, 혈육은 없으며, 절친한 사람들과도 헤어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편지인 책들은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견딜 수 없다.
 나는 클레어의 어깨를 껴안고 쟈드를 바라보았다.

『쟈드.』
『뭐, 뭐야.』

 쟈드는 주춤하면서 그렇게 반문했다.

『시간, 조금은 있지?』

 수도원의 높으신 분들이 밤새도록 말을 타고 달려올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뭐, 그거야…. 하지만 아침까지 기다릴 거야? 늦기 전에 가능한, 사람이 많은 도로까지 나가지 않으면 길에서 녀석들의 무리와 스쳐 지나갈 때 관심을 끌지도 모른다고. 특히 이곳엔 사람의 왕래가 적잖아.』
『알고 있어. 그럴 필요까진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한 후, 클레어를 향해 말했다.

『클레어, 제안을 할게.』
『?』

 나를 보고 바보다, 뭐다, 라고 나무라던 여자아이는 내 말에 매달리듯 눈물에 젖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책을, 한 권만 가지고 가자.』
『뭐? 야, 그건.』

 쟈드가 그 말을 듣고는 소리를 쳤고, 클레어는 살짝 놀랜다.

『알아. 위험한 일이라는 거. 하지만 한 권 정도라면 들키지 않을 거야. 2천 권이나 있으니까. 목록을 만들 때도 잘못 기록한 정보가 있는 건 당연한 거야. 빼갔다고 해도 모를 거야.』

 그리고 그 정도 수량이 되면 수량 계산은 보통 하지 않을 것이다.
 클레어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눈가를 훔쳤다.

『괘, 괜찮을까?』

 하지만 그 말에 무심코 웃어버렸다.

『여기 이 책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클레어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있다가, 간지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 네. 그런 거구나.』

 한 줄기 빛은 잘했다고 말하고 있다.
 단 한 권으로 건드렸다는 증거는 남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뒤집는 영웅담이나, 기적의 이야기에 비할 바는 못되나 우리에게도 그 정도의 반격은 용서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쟈드는 조금만 기다려줘.』

 난 클레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면서 그렇게 말했다. 쟈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단 하루 이틀 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고 물었다.

『알았어. 서둘러.』

 귀찮은 듯한 쟈드의 말을 뒤로 한 채, 나와 클레어는 밤의 수도원의 안뜰을 걸으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돌계단에 발을 올리자 머리 위로 악마의 형상이 보였다. 도둑질이 끊이지 않은 도서관에 악의적으로 침입하는 자를 향해 노려보는 존재.
 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클레어가 소매를 당기면서 시선을 옮기게 했다.

『도둑질이 아니야.』

 클레어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빌리는 거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돌계단을 올라갔고, 클레어도 뒤따라 왔다. 문을 열고 달빛이 닿지 않은 회랑을 지나, 서고의 문을 열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2천 권에 달하는, 클레어의 생각이 담긴 책들. 아브레아가 말한 책들의 합창이 들리는 듯했다.

『서고에선 조용히, 라는 말의 의미를 알 거 같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은 클레어였다. 아브레아가 말한 “합창”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곧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클레어의 아버지가 책에 담은 생각이 강한 것이다.

『목록은 있어?』

 옆에 있던 클레어가 말했다.

『있어.』

 나는 목록을 꺼내 클레어에게 전달했다. 이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기록한 목록이다. 거기에는 어느 서적도 멋진 것으로 쓸모없는 책은 없다.
 단 1권만 뽑는다면, 어떤 책을 선택하는 게 좋을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호사스러운 것? 아니면 가장 훌륭한 지식이 담긴 것?
 난 클레어가 목록을 바라보며 걷는 그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으나, 곧 눈을 돌렸다. 앞으로 클레어가 고를 책은, 클레어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무언가다.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알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서 궁금하다. 궁금함에 안절부절못한 것은 클레어가 가장 소중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책이,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같기를 바라는 얄팍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묘한 동료의식.
 나와 클레어만 알고 있는 비밀을 간직할 1권을 뽑기를 바랐다.

『…』

 클레어는 목록을 읽고, 모든 제목을 2번 씩 읽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읽으려 하던 차에,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그래? 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목록을 든 손을 내린다.
 서고의 입구에서 난생처음 본 바다를 눈앞에 둔 소녀인 클레어는 이렇게 말했다.

『고르지 못하겠어.』

 희미한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골라줘.』

 그런 말을 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 아, 아니. 클레어가 고르지 않으면….』
『고를 수가 없어.』

 그 말은 무척이나 비관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선택하라고 말해도 선택할 리가 없다. 말에서 떨어진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까진 좋았었는데, 라며 한심하게 첫 만남 때처럼 당황하다 문득 클레어의 손을 바라보았다. 굳게 쥔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클레어는 버티고 있다. 많은 것을. 하나하나 파고 들어가면 끝이 없는 감정들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다.
 한 권만 가지고 나가자고 제안한 것이 역효과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소한 저항보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클레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서고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잉크 얼룩에 이렇게 휘둘리게 만드는 존재. 책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라고.
 우렁이를 껍질째 삼킨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아팠다. 트림도, 구토도 나오지 않는 불쾌한 감각에 얼굴을 찡그렸다. 클레어가 내 어깨에 얼굴을 실은 것은 그때였다.

『클레,어?』
『있잖아.』

 클레어는 내 어깨에 얼굴을 숨긴 채 말했다.

『여기, 태우지 않을래?』

 클레어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이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 말은 어떤 의미에서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금 물었다.

『농담이지?』

 어깨에서 살짝 고개를 든 클레어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던 것은 한심한 얼굴이었다. 가문도, 핏줄도, 어떤 것도 벗어 던지고 없이, 그저 감정에 충실한 클레어의 모습이 있었다.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아버지의 편지가 그곳에 있지만, 꺼낼 수 있는 것이 한 조각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자신의 왜소함에 괴로워할 바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낫다.
 클레어는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인 후 서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를 괴롭히는 건 집착이라잖아.』

 내가 한 말이며, 내가 어느 책에서 주워들은 말이다.

『필이 좋아하는 책을 태운다면…. 나도 분명 견딜 수 있어.』

 클레어가 빛이 사라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것은 거울 속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마녀처럼 보인다.
 클레어가 태우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또 무엇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과거"인 것이다.
 클레어의 마음속에서 피어난 연기가 모이고 모여서 거무칙칙한 얼굴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클레어는 자신에게 일격에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곳에 오도록 섣불리 제안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저기, 전부 태워버리자. 어차피 책 속의 이야기처럼 되지 않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걸 없애는 수밖에.』
『하지만….』

 나는 말이 심한 거 아니냐고 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깨달은 것이 있다. 몇만 권의 책을 읽어 봤자,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무리다.
 책은 결국 잉크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괴롭지만, 책임을 떠넘길 상대도 있으니까.』

 클레어가 누군가를 말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아브레아다.

『긍정적인 책들이 잔뜩 있지만, 변변찮은 결말뿐이잖아. 신에 대한 신앙심을 흔들리게 만드는 한심한 책들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책은….』

 클레어는 작게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태워버리면 되는 거야.』

 소중한 물건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갈 바에는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낫다.
 하지만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브레아가 분서[각주:5]에 찬성할 리가 없다.
 만일 몰래 불을 붙였다고 해도, 그 일을 알아차린 아브레아의 노여움을 산다는 건 불 보듯 뻔하다.
 클레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말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의 위에서 만이라도, 이야기 속에서만이라도 운명을 거역하고 싶은 것이다.

『저기, 있잖아. 양초를 가지고 올까?』

 클레어는 내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과자를 달라고 칭얼대는 여자아이처럼.
 클레어는 자신의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이 빌어먹을 세상, 이라고 생각했다.
 책 속에서 천사를 불러내라는 말을 하는 아브레아에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 당장, 천사를 불러내라고.
 책에 쓰여 있는 것은 결국 붕 떠 있는 글자에 불과하다.
 어느 곳에도 현실 따윈 없다.

『저기, 필, 있잖아.』

 클레어는 내 소매를 당기더니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버렸다.
 가늘고 둥근 등은 몹시 작고 연약하다.
 클레어는 분명 이런 모습으로 홀로 교회 뒤편의 무덤에서 울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아이를 구할 수 없는 인류의 지혜 따위는 똥통에 쳐 넣어야 한다.
 나는 서고를 돌아보며 수많은 서가 중 하나에 손을 뻗었다.
 클레어가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서고의 입구에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성전과 교회법이 기록된 책이었다.
 입으로는 이러쿵저러쿵하면서도 이렇게나 신의 경의를 표하고 있잖아. 그런데도 신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지?
 나는 교회법을 기록한 두꺼운 책을 꺼내고는 높이 치켜들었다.
 거기에는 교회의 조직과 신도들이 따라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적혀있다.
 하지만 사제가 유부남이고, 교황이 도박에 빠진 세상에서,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클레어의 말대로 이단심문관은 이런 책이야말로 불태워 버려야 한다.
 피로 얼룩진 검은 옷에 어울리는, 분서의 불꽃으로 불태우라고!
 내가 그 두꺼운 책을 바닥에 내려치려 한 그 순간이었다.

『분서?』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왠지, 지금까지 메말랐던 수로에 물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당황한 채로 들고 있던 교회법 책을 펼쳐 넘겼다.
 장서가로 자칭하는 이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는 성전과 교회법의 책.
 나도 읽은 적이 있는데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법을 공부하는 방법이나, 성전에 관련된 단어의 해석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독서 지침서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다.
 펼쳐본 곳은 종교재판이 기록된 페이지.
 책을 사랑하는 자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확인한 적이 있을, 분서와 관련된 곳이었다.

『이건…. 역시….』

 나는 순간 번개처럼 찾아온 자신의 생각이 책의 기록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어쩌면,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
 주저앉아 있는 클레어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붙들고 일으켰다. 눈에는 초점이 없을 정도로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나는 두꺼운 교회법의 책을 겨드랑이에 끼운 채 말했다.

『클레어. 책의 위력을 발휘할 때야.』
『뭐?』
『클레어의 아버지가 남긴 책의 위력을 지금 여기서 마음껏 발휘하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의 클레어에게 나는 귀띔했다.

『응? 확실히 그렇게 쓰여 있지만, 그래도….』

 클레어는 설명을 들을수록 불안해하는 얼굴이 되어 간다. 하지만 부정은 하지 않았다. 무리라고도 하지 않았다. 불안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황당무계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클레어 또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책에서 천사를 끌어내는 완력이다. 그 점에 관해 설명하자 클레어는 나의 계획을 이해했다기보다 마지막 순간을 맡긴 듯했다. 불을 지르는 것을 대신하는 것으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가 막힌 듯한 탄식을 내뱉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서가로 향했다.

『이거면 어때?』
『괜찮네.』

 클레어는 금속으로 네 모서리를 장식하고, 사슴 가죽 표지로 장정된 수도원의 규칙집을 들어 올렸다. 송아지도 때려죽일 수 있을 무게와 두께를 가진 그것을 클레어는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클레어의 아버지는 아마 이런 일도 계산하셨을 거라고 생각해.』
『그럴 리가.』

 클레어는 쓴웃음을 지으며 책을 내려 가슴에 품었다. 그렇게 하니 규중 아가씨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그러나 고개를 으쓱하던 클레어는 까르르 웃으며 위험한 소리를 한다.

『의외로 그럴지도 모르겠네. 오래전에 저택에 숨어든 도둑을 책으로 때려눕힌 적이 있거든.』
『하하.』

 설마 진짜 그렇게 사용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으나, 어느 정도 효과인지는 이해가 됐다.

『그럼 가볼까?』
『응.』

 나와 클레어는 서고 안으로 가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그 시선의 끝에는 아브레아가 책을 읽고 있었다.

『이단심문관님.』

 공손하게 말을 걸자, 아브레아는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곧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전제[각주:6]는 문제가 없다. 논리도 갖춰졌다. 부족한 것은 천사를 끌어내는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클레어는 두꺼운 책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아브레아에게 다가갔다.

『잠시 부탁이 있습니다.』

 협상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가식적인 표정과 상냥하게 말을 건넸겠지만, 나는 웃는 얼굴을 잘 만들지도, 위압감을 내뿜지도 못했다.
 오로지 무거운 책을 머리 위에 들어 올린 채 그것을 떨어트리지 않게 힘을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것밖에 없다지만 그것 때문에 박력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부탁입니까.』

 아브레아는 책을 덮고 이쪽을 바라보더니 앉은 채로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 책이 제 머리에 떨어지면, 저는 죽는다고요.』

 마치 그런 일을 겪은 듯한 말이었다.

『그렇, 겠죠.』

 아브레아를 바라보던 나와 클레어는 한 발짝 내디뎠다.
 물러날 생각은 없다.
 우리의 의지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들을 가치가 있다면 듣겠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이단심문관. 내가 어렸을 때 내 또래의 아이들을 속이면서까지 교황청 도서관에 잠입, 책을 읽을 만큼 읽은 후 모습을 감춰버린 이단심문관. 그렇다면 듣고 승낙해줄 것이다. 책을 좋아할수록 들어줄 것이다.

『이 도서관의 책을.』

 그다음은 클레어가 말했다.

『전부 태우고 싶어요.』

 나와 클레어가 생각한, 운명에 맞서는 방법.
 그리고 책에서 천사를 끌어내는 마법의 말.

『재밌네요.』

 흑의를 두른 이단심문관은, 초승달 같은 눈과 입으로 미소지었던 것이었다.






  1. 本領. 근본이 되는 큰 줄기나 요점. 또는 사람이 본디 가진 성질. [본문으로]
  2. 석탄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부터 사용한 흔적이 있으나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중세 유럽에서 부터였다. [본문으로]
  3. 敬虔. 초월적이거나 위대한 대상(對象) 앞에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상태에 있음. 또는 신의 계시에 순종함. [본문으로]
  4. 원문은 後ろ髪を引かれる로, 직역하면 "뒷꼭지가 당겨지다."가 된다. 일본에서 미련이 남아 쉽게 그 자리를 떠나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본문으로]
  5. 焚書. 언론 통제를 목적으로 지배자의 의향에 맞지 않는 서적을 불태워버리는 것. [본문으로]
  6. 前提. 논증에서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결론을 얻을 수 있는 명제. 즉 어떤 명제를 근거로 하여 다른 명제를 도출해 내는 경우 그 근거가 되는 명제를 전제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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