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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종막

(◉◞⊖◟◉) 2017. 6. 3. 22:44

와 클레어가 빈손으로 돌아오자, 쟈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볼일이 끝났다는 말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클레어는 나와 쟈드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탔고, 한밤의 길을 걸어갔다. 길가에서 잠깐 노숙 한 후, 다음날 낮이 되어서야 상회에 도착했다.
 쟈드는 마치 산책을 다녀온 듯했지만, 나의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말에 올라탄 클레어도 오랜만의 긴 승마에 지친듯했다.
 마중 나온 쟈드님께 인사를 드리는 둥, 마는 둥 한 나와 클레어는 상회의 객실로 안내되고 나서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눈을 뜬 것은 저녁이 되고 나서였는데, 클레어 쪽이 좀 더 빨랐던 것 같다.
 유리창을 통해 항구에서 벌어진 소동을 바라보던 클레어는 내가 깨어난 것을 알게 되자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서적상의 일이 남아있잖아.』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리고 향한 곳은 봇쵸 대장의 공방이었다.

『방금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건 대낮이었지.』

 굵은 목소리로 야단을 쳤지만, 나는 주춤하지 않았다.

『뭐, 그건 그렇고 돌아왔다는 건 포기했다는 거지?』

 쟈드를 통해 수도원의 일은 전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뒤쪽에는 클레어가 서 있다.
 이제 안개 속에서 헤매지 않는다.

『포기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봇쵸 대장이 나를 보며 수염을 부르르 떨다 벌컥 나를 껴안았다.

『오오. 그래! 마침내 결심했구나! 책의 길 위에서 살아가는 네가, 힘들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길은 누구도 나가선 안 되는 거야. 우리는 안개를 먹고 살 수 있는 망령이 아니니까. 만약 신의 뜻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시대라면 그때―.』

 라고 말하는 봇쵸 대장의 품 안에서, 나는 꼼짝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말을 건넸다.

『저, 스승님.』
『응?』

 나 같은 식충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스승에게는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스승을 배신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꿈 역시 배신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일?』

 무슨 말이지? 라는 곤혹스러워하는 대장에게, 나는 말했다.

『마차를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에 사용하려고?』

 나를 품에서 놓아준 대장이 험악한 얼굴로 물어본다. 대답 여하에 따라 얼굴 형태가 바뀔 정도로 맞을 수도 있다. 그런 긴박함을 앞에 두고도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적상의 일입니다.』
『새삼스럽게 그런 농담을….』
『2천 권.』

 대장의 손이 내 머리 붙잡고 어깨를 붙잡으려는 것을 막아 세웠다.

『뭐라?』
『2천 권, 운반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라고? 무슨 일이냐? 수도원의 일에 대해선 들었다. 대(大) 지델님에게 누가 된다는 걸 모르느냐!』
『압니다. 그렇지만 저도 서적상입니다. 책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전력을 다할 의무가 있습니다.』

 걸어오면서 필사적으로 생각했던 말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무시당하고, 무시당해버리면 다시 이어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장이 신음을 내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저기 있는 아가씨는 그 아가씨지? 인제 와서 재산도, 그 어떤 것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수도원에서 책을 가져올 테냐? 어떤 방법으로?』

 나에게서 손을 뗀 대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책을 원하는 건 그녀가 아닙니다.』
『뭐라?』
『아브레아님입니다. 이단심문관인.』
『무슨 말이냐.』
『아브레아님은 수도원에서 위험한 책을 발견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을 흔들만한 사상이 기록된 대량의 책 말입니다. 그러므로 증거 인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책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 설마….』

 나는 머리를 매만지고, 옷깃을 고친 후 단언했다.

『교회법으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이단심문관이 분서를 자청했습니다. 그래서! 책의 이송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나는 벅찬 숨을 가다듬고 얼굴을 웃음에 맡기고 이렇게 말했다.

『분서의 뒤처리도!』

 아브레아는 흑의를 두른 이단심문관이며, 그정도 격식을 갖춘 수도원이라면 어떤 문제라도 돌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2천 권에 달하는 책이 있고 아브레아조차 읽지 못한 책이 몇 권이나 있다. 그러니까 분서의 일은 아브레아에게 있어서도 매력적인 것이다.
 아브레아가 왜 이단심문관이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이단심문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어떻게든 읽고 싶은 책, 갖고 싶은 책을 이단 혐의가 있다는 명분으로 몰수한 후 책을 태울지, 태우지 않을지는 주위에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책에 쓰인 것이 현실과 맞지 않더라도, 우리는 많은 것으로부터 배운다.

『필…. 너…. 』

 봇쵸 대장은 진심으로 기가 막힌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책을 전달한다. 그것이야말로 서적상의 일이라면 나는 정직하게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봇쵸 대장은 천장을 바라보며 커다란 주먹을 치켜들곤 굳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내 머리에 주먹을 내리꽂은 후 힘을 실었다.

『난 칭찬해 줄 수가 없다.』

 무언가를 제련하는 듯 내 머리 위에서 주먹을 빙빙 돌린다.

『하지만.』

 이라는 말과 함께 내 머리에서 주먹을 떼어내며 말했다.

『기뻐하는 사람은 있겠지.』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섰고, 숨을 들이마신 후 뒤돌아보았다.

『마차를 준비하지. 2천 권이라고 말했나?』

 곧바로 얼굴을 돌려 대장을 바라보았고,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이야기구먼. 원격지 무역선이 두 척이나 들어와 야단법석인데…. 2천권이라고 하면 계산대의 피치노가 폭발할 거야.』

 대장은 공방을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길 정돈 하면 어떻게든 될까?』

 그것을 예상하고 아브레아에게 부탁했었다.

『뭐. 이 상회에 가져오는 책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재고 관리니까. 정말이지 너는.』

 대장이 빙그레 웃는다.

『훌륭한 서적상이다.』

 그 말이 얼마나 기쁜지 십만 권의 책을 읽은 나로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아니, 스승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자신이 울고 있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새 옆으로 클레어가 왔음에도 한동안 눈치채지 못했고, 살짝 뭔가 닿는 느낌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니, 또 다른 의미로 살아난 건지도 모른다.

『호오.』

 이쪽을 보고 있던 대장이 이상한 목소리와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성큼성큼 걸어서 방을 나갔다. 남겨진 나는 클레어를 곁눈으로 바라본 채 굳어있었다.
 옆에 서 있던 클레어는 까치발을 멈추고 발바닥을 천천히 바닥으로 붙였다.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책 속에선 감사 인사를 이렇게 하잖아?』


 그것이 현실로 일어나다니.
 나는 자신의 뺨이 정말로 거기에 있는 건지 확인하려다 손을 멈추었다.
 만지는 건 아깝다, 죽을 때 까지 얼굴을 씻지 말아야 하나, 라는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넓은 도서관에서 이렇게 좁은 곳이 서가가 되는 거구나아.』

 클레어가 공방을 둘러보며 편안하게 말했다.
 둘러보던 클레어는 빙글빙글 돌다 발을 삐끗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꺅!』

 수도원에서의 황폐한 삶과 어젯밤부터의 강행군으로 얻은 피로가 아직 덜 풀린 것일까?
 그러나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운 클레어는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후후. 책 냄새가 나네.』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는다.

『여기서 자는 거야?』

 말단은 자신의 방을 가질 수가 없다.
 내 말에 클레어는 배에 손을 얹더니 쿠훗,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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